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나이롱 신자다. 나이롱은 등장 당시만 해도 일명 ‘꿈의 섬유’라 불리며 줄기세포 발견에 비견될 만큼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섬유의 이름을 넘어서 그냥 ‘좋은 것’을 가리키는 대명사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점점 나이롱이 결코 좋은 제품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은 겉보기와는 다른 내실없는 것을 지칭하는 전혀 반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대학시절 내 꿈은 선교사였다. 학기 중과 방학 가릴 것 없이 성경공부와 교회모임에 참석했고, 주일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봉사하고, 공강 시간과 방과 후에는 ‘네비게이토’라는 하드코어 선교회에서 활동을 했다. 미전도종족 전문인선교사를 양성하는 인터콥(Intercoop)이라는 곳에서 ‘비전스쿨’과 ‘지역연구센터’ 과정을 두 번이나 이수했을 정도로 열혈 교인이었고 단기 해외선교도 다녀왔다. 한참 취업준비에 열을 올려야 할 대학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미국 미주리에 있는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늘 성경구절을 손바닥이나 작은 쪽지에 적어 하루 종일 중얼중얼 외우고 다니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는 한 마디도 못하는 내가 ‘도를 아십니까?’처럼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전도를 했을 만큼, ‘광신자’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술, 담배는 입에 대 본 적도 없고, 미팅이나 MT는 물론 클럽, 노래방 등 유흥관련 시설은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TV를 보는 일도 거의 드문 극도의 금욕생활을 무려 24살까지 했다. 

그랬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그 열정 끓어 넘치던 교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180도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전환의 계기는 아마도 미국에서 짧지만 무게 있는 신앙생활 겸 공부를 하는 동안 일어났던 것 같다. 돈 한 푼 없이 시작했던 유학생활이었던지라 학교에서 화장실, 건물 청소를 하면서 어렵사리 벌어 학비를 내고 남은 돈으로 입에 풀칠만 근근이 했다. 학교에서 파는 점심이 한끼에 겨우 2달러 정도 했는데도 늘 식당 앞에서 고민만 하다 돌아오곤 했다. 유일한 수입원이었던 청소 알바는 시작할 때, 마칠 때를 타이머에 시간을 찍어 일한 시간만큼 보수를 받았는데 늘 슬렁슬렁하면서 시간만 길게 늘였다. 마감 타이머를 늦게 찍기 위해 중간에 외출을 하기도 하고, 잠깐 잠을 자고 나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몇 푼 되지도 않는 시간수당을 조금이라도 더 받자고 양심과 바꾼 셈이다. 당시에는 내 사정이 이러니 하나님도 이해하실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나…’ 싶었다. 선교사가 되기 위해, 누구보다도 모범적인 삶을 살기위해 모든 쾌락을 절제하며 살던 내가,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 신학대학에까지 와서 도둑질을 하고 있었다. 원래는 대학원까지 갈 생각도 있었지만 일년 반 만에 미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한 가지 결심을 했다. 

‘Be you.’ 내가 누구인지 부정하지도 속이지도 말자는 것이다. 이 결심은 스스로 나이롱 신자라며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다고 까지 말할 수 있는 믿도 끝도 없는 뻔뻔함의 이유이기도 하다. 나이롱은 잘못이 없다. 값도 싸고 나름의 좋은 쓸모가 있다. 하지만 나이롱이 모든 ‘좋은 것’의  대명사에서 그 반대의 나락으로 떨어진 이유는 나이롱이 비단의 대체물인 것처럼 나이롱을 거짓 포장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나이롱임은 부끄럽지 않다. 다만 늦게라도 내가 비단이라고 거짓말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아 참 다행이다.
 
주한FIJI관광청 지사장 www.facebook.com/fijias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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