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에는 이순신 장군의 흔적이 생생하다. 이순이 장군이 이끌던 전라 좌수영이 있던 여수에서는 매년 5월이면 전라 좌수영 수군 출정식이 열린다. 우수영이 있던 해남과 진도 일대에서는 9월 명량대첩축제로 장군을 기린다. 장군의 기개를 찾아 남도로 떠난다.  

●여수 좌수영 
전군 출정하라! 지금도 쩌렁쩌렁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찾아 여수 진남관으로 향했다. 여수항을 곁에 둔 이순신 광장에서 종고산 비탈을 오르는 길에 진남관이 기다리고 있다. 본래는 이순신이 이끌었던 전라 좌수영의 본영으로 사용한 진해루가 있던 자리인데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1599년, 지금의 객사로 다시 지었다. 당시 궁을 제외하고 지방에 세워진 목조건축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건축물이다. 

비탈 아래로 고개를 돌린다. 여수 시내와 여수 앞바다 그리고 돌산대교가 눈에 들어온다. 장군의 시선도 그 어디쯤에 머물렀겠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의 시선, 그의 생각을 좇아가 보는데 솔직히 가늠되질 않는다.  

진남관 앞마당 담장 곁에 서 있는 여수 석인도 인상적이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 만드는 데 힘을 쏟는 동안 왜군의 공격이 심해지자 7개의 석인상을 만들어 세워 놓았더니 왜군들이 이곳을 피해 공격로를 찾다 매복에 걸려 잡히기 일쑤였다고 한다. 7개 가운데 하나만이 남았는데 이제는 왜군을 걱정할 일이 없어서인지 바다를 등진 채 진남관을 지키고 섰다. 

진남관 아래 이순신 광장, 이곳에서 이순신 장군의 출정 외침이 바다 멀리 뻗어가지 않았을까.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각오로 발걸음을 떼었을 수군이 아른거린다.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마주하는 짧은 여정만으로도 맘속에 꽤 묵직한 파장이 일었다.
 
●해남 우수영 
바다가 운다, 배를 띄워라
 
빠르게 흐르는 물살이 수면 아래 암초에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그 소리가 마치 바닷목이 우는 것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 울돌목이다. 울돌목을 한자식으로 표현하면 울 명(鳴)에 들보 량(梁)을 써서 명량(鳴梁)이다. 빠를 때에는 13노트, 시속으로 따지면 24km에 가까울 만큼 숨이 가쁘다. 동네 어르신 말씀으로 ‘일곱물 사리 때’가 가장 드세다 했다. 그게 언젠지 갸우뚱 했더니 바다사내는 눈치껏 ‘보름달 뜨는 날’이라 덧붙여 준다. 그래, 그날 그 달빛 아래 아낙네들은 손에 손을 잡고 강강술래, 회오리 바다 꼭 닮은 원을 휘휘 그렸겠지. 

진도 망금산 꼭대기 진도타워에 오르면 진도 앞바다 너머로 옛 우수영 자리와 진도대교 아래 울돌목이 시원하게 내다보인다. 이상도하지. 그러니까 1597년 9월의 보름날, 왜선 330척 가운데 133척이 저만치 앞에 도열했는데 고작 13척뿐이었던 이순신의 수군이 어찌 승전을 하였을까. 문화관광해설사의 옛 이야기에 귓바퀴가 씰룩댄다. 선승구전(先勝求戰)이라고 했다. 승리를 확보한 후에 전쟁에 임한다는 말인데 더 구체적으로는 이길 조건을 만들어 놓고 전투를 한다는 뜻이다. 

이순신 장군은 늘 전투 장소를 선점하고 적을 그리로 유인했다고 한다. 명량해전도 마찬가지였다. 혹여나 적군에 밀리게 될 경우 울돌목을 등 뒤에 두면 사지에 내몰리게 되기에 울돌목을 사이에 두고 왜군과 대치하게끔 우수영에 진을 쳤다. 울돌목은 물살도 빠르지만 그 폭이 좁아 왜선이 한 번에 대 여섯 척밖에 들어올 수 없었던 것도 이순신의 선승구전 지략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잔잔했던 물살이 점점 가빠진다 싶더니 이내 뱅글뱅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자석에 이끌리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뭍에 서 있는데도 그 물살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에 스멀스멀 매스꺼운 기운이 올라왔다. 물살이 빠른 날도 아니라는데. 

이순신 장군 동상이 우두커니 진도 앞바다를 향해 서 있는 해남 우수영 울돌목 앞에서 이내 마음의 여지없이 휩쓸리고 만다. “바다가 운다, 배를 띄워라.” 이리 명하지 않았을까. 귓전에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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