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보다 먼저 봄을 만났다. 
아리산 벚꽃은 우리나라보다 한달 반이나 앞서 진분홍 물감을 톡톡 터뜨리고 있었다. 타이완 여행은 처음이 아니지만 올 때마다 새롭다. 예전엔 몰랐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작은 섬나라는  결코 작지 않다는 사실에 놀란다. 만약 타이완이 두 번째라면 가오슝과 주변 명소를 추천한다. 타이완의 또 다른 모습에 빠지게 된다. 비행기로 두 시간 반, 가오슝(高雄市)에 도착했다.
 
거대한 나무 사이를 걷다보면 절로 힐링이 되는 기분
 
●타이완의 허리를 오르다

이번 여행의 최대 목적은 아리산(阿里山)이다. 자이(嘉義)로 향했다. 자이는 아리산으로 가기 위한 관문 도시로 가오슝에서 북쪽으로 1시간 반이면 도착한다. 왕복 8차선 도로에서 2차선 도로로 접어들수록 시골 풍경이 무르익었다. 혹시 몰라 캐리어 깊숙한 곳에 넣어둔 경량 패딩 점퍼를 꺼내 입었다. 오가는 사람은 아리산 관광객 몇 명뿐. 세븐일레븐만이 불을 밝힌 적막한 마을엔 장작 타는 냄새가 퍼졌고 공기는 쌀쌀했다.  

새벽 6시 호텔에서 이른 아침식사를 마치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2시간 반 정도 아리산을 빙글빙글 감아 돌며 올라갔다. 자이에는 백두산만큼 높은 다타산(2663m) 등 18개 봉우리를 간직한 아리산 산맥이 있다. 그 중 아리산은 해발고도가 2,481m에 이른다. 한라산이 2,000m 조금 안 되니 그 높이가 짐작이 된다. 버스 안에서는 머리가 시계추처럼 왼쪽 오른쪽으로 끊임없이 흔들렸다.  

속이 울렁울렁해질 때쯤 다행히도 까무룩 잠에 들었고 어느새 아리산 역에 도착했다. 타이완은 높은 산맥이 남북으로 이어져있고 열대와 아열대를 나누는 북회귀선이 아리산 산맥을 가로지른다. 이런 이유로 아리산 꼭대기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운해로 덮였던 산봉우리가 새파란 하늘에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운이 참 좋은 거란다. 일 년에 30일도 안 된다는 아리산의 맑은 날이다.  

고산열차를 타고 아리산 트레킹의 시작점인 자오핑(沼平)역으로 향했다. 아리산에 오르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자이 시내 자이역에서 삼림열차를 타고 4시간 가까이 산을 올라가는 것이지만 열차는 하루에 1편(주말엔 2편)만 운행한다. 일정상 우리는 버스를 타고 아리산역까지 올라와 미니 산악열차를 체험하고 자오핑역에서 내려 트레킹을 시작하는 방법을 택했다. 일반적으로 판매되는 가오슝-아리산 여행상품이 이런 방법으로 관광객을 실어 나른다.  

미니 산악열차를 타고 가는 구간은 10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코스지만 흥미만점이다. 산악열차는 테마파크나 올드타운에서나 만나볼 수 있을 듯한 빨간 빈티지 스타일. 한 두세 량 정도 될까. 아담하고 귀엽다. 열차는 덜컹거리며 울창한 숲을 관통해 올라간다. 내부는 우리나라 전철처럼 생겼는데 좌우로 길게 좌석이 늘어서 있고 천장에는 동그란 손잡이가 대롱대롱 달려있다. 열차에서 아날로그 감성에 빠져들려고 하는 순간 자오핑에 도착했다. 

자오핑은 이번 트레킹의 시작점이다. 물기 머금은 흙냄새가 훅 풍겨왔다. 촘촘하게 박혀있는 이쑤시개처럼 거대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있다. 히노끼나무와 삼나무는 하나같이 저돌적으로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있다. 빛이 좀처럼 들어오지 않아 흙은 촉촉하고 나무에는 이끼가 가득하다. 공기는 얼마나 청량한지. 레모나를 먹고 와사비를 맡은 기분이다. ‘아, 상쾌해!’ 동행인은 아리산에서 십 년 묵은 비염이 다 나았다면서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그 말은 과장은 아닐지도 모른다. 실제로 히노끼나무는 소나무보다 5배나 많은 피톤치드를 발산하는 나무인데다 강력한 항균, 살균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자꾸 두 팔을 하늘로 뻗어 기지개를 켜보게 된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쾌함이다.
  
나무 전체를 렌즈에 담기 위해 누워야만 했다. 산을 오른다기보다는 나무숲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랄까. 비현실적인 숲에서 영화 아바타의 배경이 떠올랐다. 중국인들이 타이완 여행을 할 때 가장 가고 싶은 곳 1위가 아리산이라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타이완에서 보기 드문 대륙 스케일이다. 흙 위로 드러난 나무 뿌리는 웬만한 사람의 허벅지나 팔뚝 만하다. 나무 밑둥은 성인 남성 대여섯이 손에 손을 잡고 둘러서도 모자란 크기. 수령이 1,000년이 훌쩍 넘은 나무는 아리산에 흔하다. 최고령 나무를 신목(神木)이라 하는데, 나이가 2,300년에 이르고 높이 45m, 둘레 12.3m에 달한다. 
 
 
●봄은 꽃이요 산이다

일제가 탐낼 만도 하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으로 대만을 지배하게 된 후 아리산의 삼림 자원 수송을 위해 1911년 아리산에 산악 철도를 건설했다. 히노끼 목재를 비롯한 수많은 거대 목재를 수송하기 위해 지어진 철도는 이제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기특한 관광 자원이 됐다. 

걷다 보니 거울처럼 맑은 연못이 등장한다. 곧이어 초록 연못이 또 나타났다. 언니 연못과 동생연못으로 불리는 두 연못엔 비극적인 이야기가 서려있다. 자매는 공교롭게도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됐는데, 동생을 위해 언니가 연못에 몸을 던지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동생도 연못에 뛰어들었다. 자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지붕을 2개 얹은 정자를 세웠다는 설화다. 

어느새 하산 길, 진분홍의 벚꽃이 톡톡 터져 초록색 잔디에 폴폴 내려앉았다. 아니, 봄이 내려앉았다. 거대한 나무 사이를 관통하는 트레킹도 멋지지만 아리산의 정점은 벚꽃이겠다. 화사한 벚꽃아래서는 누구나 사랑에 빠진 얼굴이다. 사람들이 아리산을 ‘벚꽃의 수도’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화려하고 화사하다. 
 
▶Travel Info  아리산 가는 법
아리산에 가기 위해서는 조금 큰 맘을 먹어야 한다. 타이완의 중심 조금 아래 위치한 아리산은 타이중, 타이난, 가오슝 어디서 출발해도 되지만 아리산의 관문인 자이를 거쳐야만 한다. 자이시 지역에 숙소를 잡고 아침 일찍 버스로 2시간 반 정도 달려야 아리산역에 도착할 수 있다. 신목행 열차는 아리산역에서 자오핑역을 왕복하며 하루 10여 회 운행한다. 
 
 
아리산 글·사진=김진 Travie Writer  취재협조=엘트래블 02-6080-8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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