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답사 1번지. 진부하다고도 할 법하지만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이 또 있을까. 하나의 거대한 예술촌이 된 해남의 구석구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술이 꽃 피는 그곳으로.     

고산 윤선도 유물 전시관
고산 윤선도 유물 전시관

비자나무 숲에 바람 스밀 때


우거진 비자나무 숲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자 ‘쏴아’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비가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고산 윤선도도 아마 같은 생각이었겠지. 고택 사랑채에 붙은 ‘녹우당’이라는 이름도 바로 그 소리에서 영감을 얻어 지었다고 하니 말이다.


녹우당과 그 일원은 윤선도의 자택이자, 해남 윤씨의 종가가 이어져 내려오는 곳이다. 이 고택이 처음부터 이곳에 있지는 않았다. 효종이 그의 스승의 노고를 기리며 하사한 집을 낙향하며 옮겨왔던 것이다. 왕이 지어준 집을 함부로 방치할 수 없었던 당시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남도로 내려온 윤선도는 녹우당보다 보길도에 지어 놓은 세연정과 낙서재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지만.

녹우당 돌담길
녹우당 돌담길

녹우당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는 유물전시관이 있다.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 등 해남윤씨 집안에 내려오는 작품을 비롯해 여러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을 지나 녹우당을 중심으로 한 마을길을 따라 들어섰다. 마을 뒤로는 산비탈을 따라 한겨울에도 짙은 녹음을 자랑하는 비자나무 숲이 이어졌다. 산을 오를수록 오래된 비자나무가 푸른 잎을 흩날리며 손짓했다. 적막과 고요가 공존했고, 이따금 들려오는 바람소리는 녹우당이라는 이름을 연상케 했다. 비자나무 잎이 푹신하게 내려앉은 숲길과 고즈넉한 돌담길을 한 바퀴 휘이 돌고 나니, 청아했다.

미황사 대웅보전
미황사 대웅보전

 

  
미황사에서 받은 선물


남도 기행 다음 장소는 미황사다. 거칠게 솟은 달마산의 능선은 오래된 대웅보전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여전히 그 위용을 자랑했다. 고요한 정적이 사찰의 분위기를 한껏 평온하게 했다. 어디선가 스님들의 수행하는 모습만 이따금 눈에 띌 뿐이었다. 
대웅보전과 마주 보고 있는 자하루미술관에서는 마침 달마고도라는 길을 조성한 과정을 담아낸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한쪽 벽면에 내걸린 한국화가 조병연 작가의 작품 ‘천불’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각양각색의 모양인 돌 천 개에 불상을 그려 넣은 작품이다. 썰물 때마다 바닷가로 나가 돌을 구해 그렸다는 이 작품에는 왠지 부처보다는 인간의 고뇌가 더 담겨 있는 듯했다. 
미황사의 주지인 금강스님이 손님들을 반갑게 맞았다. 인자한 미소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눈 녹듯 풀어졌다. 세심당 제일 끝 방에 들어가 앉았다. 방에는 미황사와 달마산을 그린 수묵화가 걸려 있었다. 미황사의 주지 스님과 차담을 나누는 것이 남도 기행의 소중한 순간이었다. 차를 나누어 마시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군가에게는 조언을, 누군가에게는 위로를 건넸다. 한 마디마다 짙은 여운이 남았고, 여행이 직업이라고 하자, 스님은 붓을 들어 글귀 하나를 써 내려갔다. 수처작주. 이곳저곳 돌아다니니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는 뜻이라는 설명과 함께.
 

상다리 부러지게, 남도 한정식


저녁은 남도 한정식이었다. 식탁 위에는 홍어삼합을 포함해 30여 가지의 크고 작은 반찬이 줄지어 등장했다. 고급 한정식 전문 식당에 못지않게 하나같이 정갈한 요리였다. 서울에서라면 한 사람당 5만원 이상은 족히 주어야 했을 텐데, 이곳에서는 약 절반 수준으로 이런 진수성찬을 맛볼 수 있었다. 어느 것부터 먹어야 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 이게 끝이 아니라는 말이 들려왔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수십 가지 반찬은 그저 애피타이저였을 뿐. 생선요리와 밥, 국 등에 이어 수정과까지 연달아 이어졌다. 막걸리와 함께 밤이 익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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