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었다. 매화꽃과 앵두꽃이 톡톡 망울을 터트렸다. 
지리산 끝자락, 순천과 하동을 천천히 거닐었다. 

하동 평사리 최참판댁. 매화꽃이 몽글몽글 맺혔다
하동 평사리 최참판댁. 매화꽃이 몽글몽글 맺혔다

 


섬진강을 끼고 달리니 하동이다. 한적한 2차선 도로에는 수령이 꽤 됐을 법한 벚나무가 빽빽하다. 봄이 완연해지면 길 끝에서 끝까지 꽃잎이 흩날리겠다. 쌍계사로 가는 길목은 ‘십리벚꽃길’이란 이름이 달렸을 정도. 봄나들이를 오자면 이곳이 제격이겠다. 매화꽃과 앵두꽃은 서둘러 피었다. 소담한 나무에 톡톡 맺힌 꽃잎은 설탕 같다. 달콤하다. 


꽃을 상상하며 쌍계사로 들어선다. 무려 신라시대에 세워진 쌍계사는 융숭한 역사만큼이나 속이 깊다. 국보 1점, 보물 9점, 지방지점 문화재 20점 등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지나칠 수가 없다. 대웅전은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다. 직선으로 이어진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그리고 팔영루를 지나야 대웅전에 닿는다. 겹겹이 쌓인 문을 하나하나 지날 때마다 속세의 근심과 때를 하나하나 벗는 기분이다. 대웅전 앞에는 고운 최치원이 비문을 쓴 진감국사탑비가 있다. 국보 제47호, 쌍계사를 설립한 진감선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흐릿해진 비문과 상처가 시간의 흐름을 곧장 느끼게 한다. 역사를 모르고 와도 진감국사탑비를 보면 쌍계사의 무게를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역사를 따라가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여행지에서 나만의 장소를 찾는 것이다. 쌍계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길을 꼽으라면, 대웅전 왼편으로 청학루를 거쳐 팔상전으로 이어지는 계단길을 들고 싶다. 계단은 108개, 불교적 의미를 되새김질 하는 길이다. 반듯하게 뻗은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올라갈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 있던 대웅전의 분주함이 잊힌다. 곧고 높이 솟은 전나무숲은 운치를 더해준다. 


쌍계사에서 10~15분 거리에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됐던 평사리가 있다. <토지>의 핵심이었던 최참판댁과 그 주변인물의 집 총 14동을 재현해 뒀다. 최근 방영했던 <미스터 선샤인>을 비롯해 여러 사극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고. 최참판댁에 들어서면,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느낌보다 원래 있었던 한옥을 보존해 둔 것 같은 느낌이 더 크다. 그만큼 사소한 부분도 생생하다. 실제 박경리 선생 생전에 최참판댁 건립을 함께 논의해 박경리 선생이 작고한 2008년 준공됐다. 작가의 마음에 드는 장소에 최참판댁이 만들어졌으니 이 공간이 살아있는 것 같은 기분은 괜한 기분이 아닐지도 모른다. 최참판댁 대문 앞에서 평사리를 내려다보면 이곳을 배경으로 피고 지었던 많은 이야기들이 스쳐간다. 꼭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삶은 소설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극적이니까. 


드라마를 보려면 화개장터로 가야 한다. 온갖 인간 군상이 모이는 곳, 장터. 화개장터는 단순히 사람이 모이는 곳만은 아니다. 영남과 호남이 맞닿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 화개면은 섬진강이 지나는 작은 마을에 불과하지만 하동포구가 성업을 이뤘던 조선 중엽에는 지리적 의미가 남달랐다. 덕분에 5일장이 만들어져 온갖 물자가 모였던 것이다. 지금은 5일장 대신 상시시장이 서서 언제든지 화개장의 재미를 즐길 수 있다. 

화개장터의 흥겨운 분위기
화개장터의 흥겨운 분위기

 

주말이면 화개장터 인근의 2차선 도로가 꽉 막힐 정도로 사람이 붐빈다. 장터는 2001년 새롭게 시설을 단장해 재개장했다. 장터 마당에서는 우스꽝스런 분장을 한 공연자들이 각설이타령을 벌이고, 북을 치고 노래를 하면서 엿을 판다. 옛 추억이 생각나 흐뭇한 어르신도 발을 못 떼고, 처음 보는 공연에 놀란 아이들도 발을 못 뗀다. 마당을 쩌렁쩌렁 울리는 흥겨운 가락에 장터가 들썩인다. 골목으로 들어서면 산지가 지리산인 온갖 먹을거리가 넘쳐난다. 각종 약재, 버섯향이 풀풀. 섬진강 민물과 남해의 바닷물이 만나는 심해에서 자라는 벚굴도 화개장에서 흔하다. 아이 얼굴 크기만 한 벚굴은 가까이 다가서기만 해도 특유의 향이 훅 풍겨온다. 3~4월이 제철이라 하니 꽃이 만개할 봄, 하동을 아니 올 이유가 없다.

주목! 우수여행상품
모두투어 www.modetour.com
[순천/하동 휴 여행]

 

글·사진=차민경 기자 cham@traveltimes.co.kr

저작권자 © 여행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