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이 가득하다. 백제의 찬란한 역사를 확 트인 공터에 상상으로 써내려갔다.

왕궁리 오층석탑이 두 그루 소나무와 함께 너른 벌판을 바라보며 서있다
왕궁리 오층석탑이 두 그루 소나무와 함께 너른 벌판을 바라보며 서있다

미래를 기다리는 미륵사지 석탑


낯설지만 익숙하다. 익산의 첫 감상이다. 역사책 속에서 수도 없이 봤으니 눈으로는 가까우나, 한 번도 와본 적은 없으니 발로는 먼 곳이다. 올해 봄, 장장 20년간의 복원을 마치고 익산 미륵사지 석탑(서탑)이 모습을 드러냈다니, 익산을 방문할 이유는 이것 하나로도 충분했다. 

미륵사지 석탑
미륵사지 석탑

미륵사지 서탑과 동탑은 휑한 공터에 다소 거리를 두고 일직선으로 배열돼있다. 하나는 9층, 다른 하나는 6층. 비대칭적인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이게 복원이 다 된 거라고? 장장 20여년의 복원을 마쳤으니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리라 내심 기대했던 마음을 한편에 고이 접어넣는다. 1993년 9층 규모의 완전한 모습으로 복원된 동탑은 고증이 제대로 되지 않아 뭇매를 맞았다고 한다. 문화재 복원은 역사적 추론이 가능한 지점에서 멈춰야한다. 때로는 다음 세대를 위해 남겨둬야 할 몫이 있다. 서탑은 20년간의 복원 끝에 또 다른 세월을 기다리며 서있다. 


익산 유적지 곳곳에는 방문객을 위한 배려가 묻어있다.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에서는 뜨거운 햇빛을 피할 수 있도록 무료로 우산을 대여해준다. 그늘이 없는 넓은 벌판을 거닐 여행자들에 대한 걱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사소한 친절은 여행자의 사색을 지연시킨다. 배려의 그늘 아래 찬란한 백제의 역사 위를 걸었다. 

왕궁리 후원 산책로
왕궁리 후원 산책로

왕궁리는 독특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바로 ‘한국 최고의 화장실 유적’이다. 초기 발굴 당시 두 개의 나무 발판이 걸쳐진 구덩이 유적의 용도에 대해 추측이 분분했다고 한다. 곡식이나 과일 등 식료품을 저장하던 창고라는 설이 가장 유력했지만, 구덩이 바닥에서 다량의 기생충알이 발견되면서 화장실임이 밝혀졌다. 주위에서는 백제인들이 대변을 본 후 뒤처리를 하던 나무 막대기도 여럿 발굴됐다. 현재의 위생관념으로서는 절로 질색하게 되지만, 물 항아리에 담궈 막대기를 헹구고 이용했다고 하니 사실 백제인들은 상상이상으로 깔끔했을지도. 

글·사진=이은지 기자 even@trave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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