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는 좀 심심하다. 경치 좋은 공원과 유럽풍의 중후한 건물들, 그리고 충실한 내용의
박물관들이 즐비해 여타 남미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안정감이랄까, 차분함이랄까 뭐 그런
분위기를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지만 어딘지 밋밋하다. 그러나 산티아고에서 차로 2시간이
채 못되는 비냐 델 마르와 발파라이소에 닿으면 이런 생각이 저만큼 물러선다.

짧은 여정 긴 아쉬움
생각보다 늦게 도착했다. 산티아고에서 마지막으로 버몬트 와인공장에 들러 포도냄새를 몸
과 마음에 그윽하게 밴 후 서둘러 발파라이소로 향했지만 어둑어둑해져서야 도착했다. 때마
침 5일간의 부활절 휴가를 맞아 한꺼번에 몰려든 차량탓이다.
그만큼 발파라이소는 휴양지로 각광받는 도시다. 칠레 사람, 특히 대도시 산티아고에 거주하
는 사람들은 주말이면, 휴가를 받으면 이 곳을 찾아 도심 생활에 찌든 때를 벗겨낸다. 유난
히 눈길을 잡아 끈 계단식 콘도의 주인들도 산티아고에 더 많이 산다.

언덕 위 그림같은 집
주말이나 휴가 한 철 주인을 맞기 위해 더 오랜 시간을 홀로 버티어 내는 이곳의 집들과 콘
도는 가지런히 몰려있는 그 모양새만으로도 참 그림이 예쁘다. 발파라이소에는 항구를 둘러
싸는 듯한 41개의 언덕이 있는데, 그 언덕은 물론이고 산허리나 정상에까지 빼곡히 들어찬
있는 집들은 각양각색의 페인트를 입고 있다. 그냥 아무 곳이나 막 잡아 프레임안에 툭 박
아넣으면 그대로 엽서가 되고, 알록달록한 정물화가 된다. 옆에서 가이드가 발파라이소란 뜻
은 ‘천국같은 계곡’이라고 귀띔해 준다. 절로 끄덕여지는 고개.
발파라이소는 어딘지 대한민국 남쪽의 부산을 닮았다. 두 지역 모두 그 나라 제1의 항구도
시라는 평면적 사실을 건너뛰더라도 언덕 위의 작은 공원들은 용두산이나 대청공원을, 발파
라이소 시장의 비릿한 내음은 자갈치시장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그 때 다시 들려오는 가이
드의 설명. “발파라이소는 부산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습니다.” 또 한 번 끄덕여지는 고
개.
좀 틀린 부분도 물론 있다. 바로 생선요리인데, 날씨가 더운 탓인지 이곳 사람들은 생선을
날로 먹지 않고 튀기거나 구운 요리를 즐긴다. 저녁으로 먹은 치즈를 담뿍 얹은 생선요리가
맛있다.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오다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내일 아침 일찍 푸에르토 몬트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 탓에 발파라
이소의 구석구석을 훑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쉽게 올 수 있는 곳도 아닌데…발파라이소
항구를 일주하는 유람선이 닻을 올리는 프라트 부두도, 시립미술관과 항해박물관 등 유서깊
은 건물로 에워싸인 소토마요르 광장도, 발파라이소의 발상지 산토 도밍고 언덕도 충분히
눈에 넣지 못해 여운을 남긴다.
그 서운함을 한 뼘쯤 더 깊게 만든 것은 라 세바티나(La Sebatina)란 이름의 집 한 채다.
칠레가 낳은 위대한 시인,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파블로 네루다가 기거했던 곳인데 발파라이
소 언덕 위 5층집이다. 필부필녀의 집에도 저마다 구구한 사연과 반질반질한 애틋함이 흐를
터인데 하물며 대문호의 집에야!
삶의 풍성함과 자연의 만장함을 읊조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강물처럼 흐르는 사랑을 간
결한 시어로 뿜었던 그의 육신과 정신이 쉬어갔던 곳. 네루다가 밟았던 1층 마당에서 발자
국을 맞추고, 구석구석 집 안팎 풍경을 사진에 담고, 햇빛이 게으른 오후 분명 네루다의 망
막에 맺혔을 창 밖 발파라이소의 풍경을 공유하고 싶었는데…영 입맛이 쓰다.
그래도 긴긴 허탈감을 가까스로 밀치며 버스에 오르는데, 문득 <일 포스티노>의 화면이 펼
쳐진다. 그리고 곧바로 소박한 우편배달부 마리오가 네루다와 만들어 가는 아름다운 우정에
까지 생각이 미치자, 애잔함이 가득 담긴 낮고 긴 탄식이 차창 밖 길모퉁이로 사라진다. 캄
캄한 밤. 처음 발파라이소에 들어섰을 때 먼저 맞아주던 언덕 위 집들이 가로등 불빛을 받
아 하얗게 부서진다.
취재협조 : 란칠레항공 02-775-1500
라틴투어스 02-756-2721
칠레 발파라이소 = 노중훈 기자 win@traveltimes.co.kr

고품격 휴양도시 칠레의 아카풀코 ‘비냐 델 마르’
시내버스로 왕래할 만큼 가까운 거리지만 비냐 델 마르와 발파라이소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발파라이소가 부두를 중심으로 칠레 소시민들의 정겨운 일상사를 비릿한 바다내
음 속에 펼쳐내 보이는 반면, 비냐 델 마르는 카지노와 고급호텔을 구비한 칠레의 대표적인
휴양도시다. ‘칠레의 아카풀코’라는 별칭이 이를 함축적으로 설명해 준다.
당연히 휴양객들의 발길이 잦은데, 특히 연말연초인 12월에서 3월까지 피크를 이룬다. 때문
에 사람 구경이 아닌 온전한 비냐 델 마르를 느끼고 싶다면 한적한 4월이 좋다. 호텔 객실
을 구하기 쉽다는 이점 이외에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세련된 느낌의 발파라이소 거리에
서 느끼는 쓸쓸함이 역설적으로 운치가 있다. 본디 여행이라는 게 여러 풍광을 접하고 여러
사람과 부대끼는 작업이지만 그 본질은 여전한 혼자있음과 곰곰한 뒤돌아 보기에 있음을 부
인하기 어렵다.
비냐 델 마르에서 하룻밤 묵어간다면 이른 아침 해변으로 산책을 나가자. 중앙광장에서 리
아나거리를 따라 15분 정도 소요하면 꽃시계가 반기는데, 해변이 가까웠음을 알려주는 것이
다. 드문 인적을 대신하는 물새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자면 이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고 머
리가 비워진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에 있지 않다. 불필요
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에 있다’라는 법정스님의 말씀이 한반도 지구 반대편
에서 더욱 새롭다.
베네치아식 건축의 미술관과 음악당이 있는 낀따베르가라공원, 대통령 별장이 있는 곳으로
유명한 꽃시계 위의 카스티요언덕, 비냐 델 마르의 시영 카지노와 멕시코광장 등을 둘러봤
다면 이스터 섬의 유물을 모아 놓은 모아이 상 박물관 관람으로 이곳에서의 여정은 거의 채
워지는 셈이다. 신천옹, 아르마딜로, 피라냐 등 그림으로만 보던, 말로만 듣던 것들이 협소한
공간에 차곡차곡 전시돼 있어 오랜 잔영으로 남는다.
박물관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는 모아이 상을 마주치면 칠레 해안으로부터 3,800km, 대한민
국에서 1만6,000km나 떨어져 있다는 이스터섬이 벌써 한 걸음이다. 그리고 거리만큼이나 아
득한 세월동안 외로운 하늘을 이고 갖은 풍상을 견디며 도도한 역사를 지켜온 그곳의 유적
과 이미 대답없는 대화를 시작하게된다.
"
저작권자 © 여행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