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여행의 중심인 부석사. 영주의 아름다움과 가치, 정신이 응축된 공간이다
영주 여행의 중심인 부석사. 영주의 아름다움과 가치, 정신이 응축된 공간이다

힘든 시기가 하염없이 길어진다.
어떠한 위로도 부족할 줄 알았건만
담담함 속에서 평온함이 찾아왔다.
선비의 고장 영주에서 말이다.

 

●내면이 편안함으로 채워질 때


국내를 비롯해 수많은 외국 도시들이 관광의 큰 주제로 힐링을 앞세운다. 그럼에도 머무는 걸음마다 쉼이 되고, 마음이 치유되는 여행지는 많지 않은 게 사실이다. 영주는 다르다. 힐링이라는 단어가 제 옷처럼 잘 어울리는 곳이 영주다. 여행의 중심은 부석사와 소수서원, 무섬마을이다.


‘영주=부석사’라고 단언해도 될 정도로 부석사(신라 문무왕 16년 의상대사 창건)의 입지는 단단하다. 영주 시내 구경은 나중으로 미루고 자연의 소리만 들리는 부석사로 향한다. 부석사 초입의 빽빽한 은행나무 숲길 앞에 서자 나도 모르게 차분해진다. 무량수전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수록 내면이 온전히 편안함으로 채워지는 신기한 경험도 했다. 가파른 108계단을 지나면 부석사의 하이라이트이자 목조건축 기술의 정점이라고 평가받는 무량수전이 우리를 반긴다. 기둥 중간 정도의 직경이 크고, 위아래로 갈수록 직경을 점차 줄여 만든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에 등을 대고 소백산과 사찰 일대의 풍광을 한없이 즐기는 게 포인트다. 국보 제17호인 무량수전 앞 석등, 국보 제19호 조사당 등 볼거리가 풍부하고, 속세를 초월해 이곳에서 멍하니 보내는 시간까지 고려한다면 2시간 정도 여유를 둬야 한다. 이런 공간의 아름다움과 역사적 가치는 전 세계에 통했고,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됐다.

선비촌의 특별체험 ‘전통혼례’
선비촌의 특별체험 ‘전통혼례’

극락을 봤다면 다음은 소수서원과 선비촌에서 만나는 선비 정신이다. 영주는 예로부터 학문과 예를 숭상했던 선비문화의 중심지로, 선비촌이 있는 순흥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였던 회헌 안향 선생의 고향이다. 소수서원도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조선시대 국왕으로부터 편액·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으로 조선 중종 37년(1542년) 풍기 군수 주세붕이 안향 선생을 기리고자 백운동서원을 건립한 것에서 비롯됐다. 그 후 퇴계 이황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조정에 건의, 소수서원으로 자리 잡았다. 부석사와 마찬가지로 숲과 건축물이 조화를 이룬 분위기가 돋보인다. 부석사가 웅장하면서 담담하다면 소수서원과 선비촌은 소소함 속에서 영주의 기품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다. 어느 시간에 오더라도 좋겠으나 아침과 해질녘의 고요함이 유독 인상 깊다. 선비촌에서는 다양한 체험도 가능하다. 한옥스테이는 물론 전통혼례, 다도예절 등 우리 선조들의 삶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

무섬마을과 외부를 잇는 외나무다리
무섬마을과 외부를 잇는 외나무다리
무섬마을은 사람의 손길이 닿아 생생함이 느껴지는 진짜 한옥마을이다
무섬마을은 사람의 손길이 닿아 생생함이 느껴지는 진짜 한옥마을이다

 

●여전히 숨 쉬는 400년의 한옥마을 


소박하지만 옛것을 고이 간직한 무섬마을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태백산에서 이어지는 내성천과 소백산에서 흐르는 서천이 만나, 산과 물이 태극 모양으로 돌아나가는 모양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섬과 같다고 해서 ‘무섬’이라 불렸다. 이곳은 여전히 400년 전, 마을의 역사가 시작했던 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진짜 한옥이 주는 예스러움을 느끼기에 더없이 좋다. 졸졸 흐르는 내성천을 보며 한껏 여유를 부리는 건 덤이다. 전국 방방곡곡에 한옥마을이 있다지만, 주민들의 삶에 온전히 스며든 무섬마을 한옥의 고풍스러움을 따라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여행자들도 어느 고택이든 머물다 갈 수 있도록 숙박 체험을 준비해뒀다.

 

마을 풍경에 한 번,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 모습에 두 번, 넉넉하고 후덕한 인심에 세 번 반하게 된다니, 하루는 오롯이 이곳에서 보내고 싶은 생각이 커져만 간다. 꼭 밟아보고 가야 하는 것도 있는데, 바로 외나무다리다. 30년 전까지 마을과 외부를 이어주던 유일한 통로란다. 예전의 외나무다리는 최단 거리를 위해 일직선의 모양이었지만 지금은 아름다움을 더하기 위해 S자 곡선으로 만들어졌다. 또 폭이 10cm밖에 안 될 정도로 좁았지만 우리나라가 발전함에 따라 폭도 점차 넓어져 현재는 30cm에 이른다. 주민들은 이를 두고 고속도로가 됐다고 우습게 표현한단다. 이밖에 350년의 역사를 지닌 만죽재 고택,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된 김덕진 가옥, 김뢰진 가옥, 무섬자료 전시관, 무섬의 식재료를 맛볼 수 있는 무섬식당 등도 있다.


식당 이야기가 나왔으니 영주의 맛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경상도 음식은 전라도와 비교해 조금 아쉽다는 말이 있지만 영주는 다르다. 광주 토박이도 맛있게 먹은 육회 비빔밥과 약선 음식 등은 별미로 꼽힌다. 그도 그럴 것이 영주의 특산품 중 하나가 영주한우라고. 천혜의 환경을 자랑하는 소백산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에서 사육된 만큼 맛의 깊이가 남다르다. 풍기인삼, 사과, 복숭아, 마, 버섯 등의 품질도 특출하다.

소수서원 초입의 소나무 숲길을 거닐자 마치 선비가 된 기분이다
소수서원 초입의 소나무 숲길을 거닐자 마치 선비가 된 기분이다

●석상에 숨겨진 비밀


영주는 불교와 유교 이미지가 꽉 박힌 곳이라 여행 일정도 두 종교 중심으로 쏠려 있다. 그렇지만 조금은 색다르게 기독교적 색채가 묻은 목적지도 들를 만하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이러한 반반 논란을 일으킨 건 다름 아닌 강동리 왕유 마을 산기슭의 돌이다. 일부 교회에선 도마바위, 불교에선 마애보살입상이라 부른다. 공식적으로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74호로 등록된 영주 강동리 마애보살입상이지만 바위에 남아 있는 문자를 두고 재밌는 논쟁이 펼쳐지고 있다. 

종교 간 해석 차이가 있는 마애보살입상

돌 앞에 세워진 비석의 설명을 보면, 왕유 마을은 고려 말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전한 곳을 찾아 안동으로 가던 공민왕이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불상은 고려 초에 유행하던 거석마애불 계열로 전체 높이가 5.76m다. 그렇지만 현재는 불상의 머리는 없는 상태다. 기독교에서는 석상 왼쪽 어깨에 있는 문자를 주목했다. 네모꼴로 새겨진 글자 중 우측 1, 2번째 글자가 히브리어 ‘타우’와 ‘멤(Thomas)’, 즉 ‘도마’라는 것이다. 도마는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이다. 일부 기독학자는 도마가 예수의 뜻을 좇아 이스라엘을 떠나 가야국(한국)에 왔으며, 실크로드를 따라 낙동강 상류(영주)까지 와서 복음과 신기술을 전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더해서 마을 주민들은 이 불상을 보고 절을 하는 불교 신자가 거의 없다고 해 논란을 가열시키기도 했다. 여행자에겐 흥미로운 스토리지만, 당분간 이 돌을 둘러싼 두 종교 간의 해석 다툼은 치열할 것 같다. 


조금 외진 곳에 자리한 내매교회로 이번 여행을 마무리해본다. 110년 이상 영주를 지켜온 내매교회는 세련된 본당과 1910년에 지어진 기독내명학교가 조화를 이룬 공간이다. 기독내명학교는 초대 교인 중 한 명인 강병주 초대 교장을 중심으로 영주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힘썼고, 1995년 3월1일 폐교 전까지 1,53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3.1운동에 참여한 독특한 이력도 있다. 2009년 시작한 영주댐 건설로 내매교회 부지가 위기를 맞았지만, 다행히 2014년 지금의 천본리 부지를 매입해 기독교사적 제11호인 기독내명학교를 온전히 옮겨와 참된 기독교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110년의 역사를 간직한 내매교회
110년의 역사를 간직한 내매교회

 


글·사진=이성균 기자 sage@trave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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