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고 있어 일본여행] 위로를 건네는 자연의 손길
[기다리고 있어 일본여행] 위로를 건네는 자연의 손길
  • 곽서희 기자
  • 승인 2020.12.18 15: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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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periences in JAPAN Nature
노을빛으로 물든 오키나와 고하마 섬
노을빛으로 물든 오키나와 고하마 섬

잊지 못할 여행의 순간들을 떠올려본다. 여행지는 제각기 다양해도, 배경은 대체로 도심보다 자연이다. 유명 맛집에서 대기표를 받고 1시간 넘게 줄을 섰을 때보다, 안개가 자욱한 깊은 산 속에서흙내음 맡으며 가쁜 호흡으로 자전거를 탔던 기억이 더 진하다. 일상에서도 종종 그렇다. 복잡한 네온사인 간판보단 해질녘의 은은한 석양빛에, 화이트 대리석으로 장식된 쇼핑몰 대신 새하얗다 못해 푸른 설원에 마음이 이끌린다. 낑깡밭까지 일구진 못하더라도 아파트 담벼락보다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창문이 좋을 때가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인간은 다른 누군가를 위로하는 데 영 소질이 없는 존재일 지도 모르겠다고. 상대를 위하는 말들은 의외로 텅 비어있을 때가 많고, 또 자주 빗나간다. 북적이는 군중 속에서 고독감이 심화되는 순간. 자연이 주는 위로에 몸을 맡겨야 할 타이밍이다. 고요하고 한적한 자연의 풍경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마음의 짐을 덜어준다. 지난해 후쿠오카의 한 해변에서 멍하게 서있을 때였다. 휘몰아치던 바닷바람도 수고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따뜻한 손길처럼 느껴졌었다. 양말에 자꾸만 파고들던 모래알들도 지금은 그리운 추억으로 남았다. 언젠가 또 여행이 시작된다면, 그때의 여행지는 망설임 없이 자연이다.

구로히메 산과 메밀밭
구로히메 산과 메밀밭

●몸에 좋은 여행
나가노현 시나노마치


세계 최고령 국가인 일본에서 1위를 다투는 장수 도시, 시나노마치는 건강 여행의 성지다. 
기대 수명 100세 시대, 시나노마치에서 여행으로 건강해지는 비법을 살펴보자. 

 

1등 중에 1등


시나노마치는 일본 열도 나가노현과 니가타현의 경계에 위치하는 작은 마을이다. 시나노마치는 건강 여행의 성지로 주목받은 지 이미 오래다. 시나노마치가 위치한 나가노현이 세계최고령 국가인 일본에서도 1위를 다투는 장수 도시임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발상이다. 시나노마치시는 천혜의 자연 환경을 활용해 ‘치유의 숲’ 트레킹 코스를 개발했고, 의료기관과 함께 산림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트레킹 전에 혈압, 피부 온도 등 건강 상태를 체크한 후 개인에게 맞는 프로그램을 선택하게 된다. 


시나노마치의 대표적인 치유의 숲 코스는 총 세 가지다. 오지카 연못 둘레를 걷는 ‘오지카이케 코스(1.2km)’, 산길을 따라 노지리 호수까지 걷는 ‘조노코미치 코스(2.5km)’, 깊은 산속의 숲을 지나 나에나 폭포까지 걷는 ‘나에나타키 코스(7km)’가 그것이다. 나에나타키 코스를 빼면 모두 초심자가 걸을 만한 거리다.

마다라오산에서 본 노지리 호수
마다라오산에서 본 노지리 호수

검은 공주가 사는 산


오지카이케 트레킹 코스는 삼나무 숲과 작은 폭포, 숲속에 비밀스럽게 자리한 연못 주변을 걷는 코스다. 코스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넓은 목장이 펼쳐지고, 그뒤로는 구로히메산이 보인다. 이산에는 특별한 전설이 전한다. 바람과 비를 관장하는 검은 용에게 시집을 가는 조건으로 폭우에 잠길 위기에서 마을을 구출했던 공주의 이야기다.마을 사람들은 공주의 희생을 기리는 의미에서 이 산을 ‘검은 공주(구로히메)’라고 불렀다.


시나노마치 사람들은 구로히메 산을 ‘시나노의 후지산’이라고 추켜세운다. 납작한 이등변 삼각형 모양의 균형 잡힌 산세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해발고도 자체는 900m로 그다지 높지 않고, 시나노마치 자체가 평균 해발 800m의 고원 분지라 정상이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너도밤나무 숲을 통과하는 서쪽 등산로가 인기이며, 오지카이케 트레킹 코스는 동쪽 고원에서 시작한다. 구로히메 동화관을 트레킹 기점으로 삼으면 된다.

숲속에 꽁꽁 숨겨져있는 비밀스러운 오지카이케의 연못
숲속에 꽁꽁 숨겨져있는 비밀스러운 오지카이케의 연못

코끼리의 작은 길


조노코미치 트레킹 코스는 숲길과 호반길을 모두 걸어볼 수 있어 매력적이다. 울퉁불퉁하다가도 평탄해지고, 음지와 양지가 골고루 뒤섞이며 나타나는 점도 재미있다. 구간마다, 트레이너마다 숲을 즐기는 방법도 다르다. 삼나무 아래서 단전호흡을 하거나 외기욕을 하기도 하고, 즉석에서 오카리나를 연주하기도 한다. 

조노코미치에서는 3m가 넘는 키의 코끼리 화석이 발견됐다
조노코미치에서는 3m가 넘는 키의 코끼리 화석이 발견됐다

‘조노코미치’라는 이름은 ‘코끼리의 작은 길’이란 뜻이다. 이 귀여운 이름의 연원은 산길을 지나 호숫가에 닿으면 알게 된다. 트레킹 코스가 끝나는 지점에 4만년 전 빙하시대 코끼리 화석 발굴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3m가 넘는 키에 상아 길이만 2.4m에 이르는 거대한 코끼리 화석이 발견됐다. 호반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코끼리 모양인 것은 이 때문이다. 흥미가 생긴다면 호숫가에서 200m 떨어진 곳에 나우만 코끼리 박물관에 가보자. 코끼리 화석과 실물 크기 표본을 전시하고 있다.

 

●숨겨진 협곡 모험  
시코쿠


일본 열도를 이루는 네 개의 주요 섬 가운데 가장 작은 섬 시코쿠. 이 작은 섬에는 꽁꽁 숨겨진 협곡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카즈라바시
카즈라바시

모험은 오보케역에서부터 시작된다. 오보케역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숨을 크게 들이마실 만큼 좋은 기운이 가득하다. 오보케는 2억년에 걸쳐 형성된 협곡 지대라 했다. 나룻배를 타고 협곡을 거슬러 유람을 할 수도 있고 차를 타고 산자락 높은 곳에 올라 협곡을 조망할 수도 있다. 버스가 드문드문 다니는 산골마을이지만 역 앞에 항시 대기 중인 택시를 이용해 한결 수월하게 협곡을 둘러볼 수 있다.

택시를 타고 구불구불 산길을 달려 카즈라바시에 다다른다. 카즈라바시는 협곡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다. 깊은 산 속에서 넝쿨을 늘어뜨리며 자라나는 다래나무로 엮었다. 엉금엉금, 주춤주춤, 흔들거리는 다리 위에서 발걸음 내딛기가 쉽지 않은데 십여 미터 아래로 빠른 물살을 타고 흐르는 계곡을 보니 더 아찔하다. 후들거리는 것이 이 다리인지, 내 다리인지. 

다시 택시를 타고 산길을 탄다. 일본어 히라가나의 ‘ひ(히)’자 모양으로 물길이 흐르는 계곡을 지나 이야 계곡까지 왔다. 이야 계곡은 인구 밀도가 낮고 시간의 손길이 닿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잘 보존돼있다. 이야 계곡을 내려다보니 웅장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동시에 끝이 안 보일 만큼 바닥이 까마득하다. “이 계곡에서 떨어지면 구급차를 부르지 않고 스님을 부른답니다.” 택시 기사의 농담에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진다. 

​카즈라바시​
​카즈라바시​

아득히 이야 계곡이 내다보이는 벼랑 끝 바위 위에 조각상 하나가 눈에 띈다. 오줌 누는 아이 동상이다. 아주 오래 전 산골마을 아이들이 이 바위에 올라 오줌 누기 시합을 벌이곤 했단다. 어린 날의 치기로 치부하기엔 꽤나 비장했을 시합이었을 텐데 어째서인지 입가엔 미소가 가시지 않는다. 그래, 이만한 높이에서 오줌 줄기 시원하게 뻗을 줄 아는 꼬마라면 골목대장 자리 정도는 충분히 차지할 만하겠다. 두려움 없이 자연을 즐겼던 꼬마들의 모습이 아른거려 다시 한 번 미소가 번진다. 


●연못을 담은 한 폭의 그림  
후쿠이시

간사이 북쪽, 일본 중부에 속하는 후쿠이현, 도야마현, 이시카와현을 통틀어 호쿠리쿠 지역이라 부른다. 이중 후쿠이현청의 소재지인 후쿠이시는 일본 특유의 차분하고 정갈한 감성을 느끼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크기는 작아도 고즈넉한 멋을 뽐내는 요코칸 정원
크기는 작아도 고즈넉한 멋을 뽐내는 요코칸 정원

열차를 타고 후쿠이역에서 하차하자마자 자연 속에서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열망에 요코칸 정원으로 발길을 내딛었다. 잘 가꿔진 나무와 꽃들이 반기는 요코칸 정원은 후쿠이의 번주였던 마쓰다이라가의 별장이다. 지금은 허물어져 후쿠이시청이 된 옛 성에서 겨우 400m 떨어진 거리다. 문헌상에 이곳이 처음 등장한 것은 1656년으로 360년이 훌쩍 넘었는데, 아직도 당시의 모습을 유지한 채 후쿠이를 지키고 있다. 

요코칸 정원에서는 카메라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요코칸 정원에서는 카메라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요코칸은 크고 화려한 정원과는 거리가 멀다. 작은 연못과 후원, 나란히 지은 건물 두 채가 전부라 한 바퀴 빙 둘러보는 데 30분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볼수록 오목조목 아름답다. 작은 목각 상자 속에 든 화과자 같다고나 할까. 작은 정원 안에 서로 다른 풍경을 조화롭게 배치한 감각이 놀랍다. 요코칸 정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연못이다. 별장 본채인 고자노마가 연못에 바짝 붙어 있어 둥실 뜬 배처럼 보이고, 연못의 물길은 정원을 휘감아 돌며 여러 개의 시내를 이룬다. 물은 바위와 꽃, 건물 등 정원에 있는 모든 것을 관통하는 주제다. 


두 채의 건물을 하나로 합친 본채에는 10여 개의 방이 있다. 내부로 들어가 보니 영주의 생활상이 좀 더 생생하게 그려졌다. 영주가 창밖 풍경을 감상하던 방에 잠시 앉아봤다. 과연 앉아 보니 서 있을 땐 몰랐던 창밖 풍경이 단정하게 펼쳐졌다. 삼나무로 만든 구름 모양 창틀 안에는 아까 지나온 정자와 돌탑, 찰랑이는 연못이 한 폭에 담겨 있었다. 가을에는 단풍잎이, 여름에는 창포꽃이 이 풍경을 수놓을 것이고, 봄과 겨울에는 매화꽃과 눈송이가 하얗게 흩날릴 것이었다. 자연이라는 화폭에는 어떤 예술 작품도 흉내 낼 수 없는 무수한 변화가 있다. 방금 전만 해도 눈앞에 있던 청둥오리 한 마리가 어느새 화폭을 빠져나갔다.

 

곽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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