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s in JAPAN Art

오카와치야마 담벼락에 놓인 도자기
오카와치야마 담벼락에 놓인 도자기

말하자면 ‘예술 알레르기’가 좀 있었다. 미술에는 문외한이라는 이유로 무턱대고 미술관을 멀리했다. 여행 일정에서도 갤러리와 박물관은 제외시켰다. 꽤 무자비하고, 약간은 무식한 결단이었다. 이런 나에게 처방전을 내려준 건 일본의 한 마을이었다. 여행 중 우연히 들른 그 마을에서 예술이 일상과 동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게 됐다. 그곳에선 어디서든지 쉽게 작품을 마주할 수 있었다. 길거리, 신호등, 우체통 옆, 심지어는 공중화장실 앞에도 조각품이 설치돼 있었다. 그곳을 여행하면서 미술관과 일상공간의 딱딱한 경계는 허물어졌다. 예술은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예술을 보면 지역이 보인다. 예술가들의 작품에는 흔히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에 대한 사랑이 묻어있기 마련이다. 지역의 곳곳에 예술의 흔적이 유적, 또는 폐허의 형태로 존재하는 경우도 많다. 지역이 보이면 애정이 생기고, 애정은 곧 그리움과 추억으로 변한다. 그렇게 여행은 한 단계 깊어진다. 나는 이제 보다 깊고 진득한 여행을 위해, 일정에 미술관을 넣어보려 한다. 처방전의 약효가 나타나는 모양이다.

●감동이 프레임 안에
돗토리 


돗토리현을 돗토리 사구로만 기억한다면 섭하다. 예술에 대한 열망과 애정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돗토리현이기 때문이다. 

 

요나고에서 다이센산으로 오르는 중간에 위치한, 우에다 쇼지 사진미술관은 돗토리현의 수많은 관광지 중에서도 꼭 들러봐야 할 명소다. 노출 콘크리트로 지어 거대한 빙하처럼 보이기도 하는 미술관은 다이센산을 바라보고 서 있다. 고향을 떠나지 않고 한곳에서 예술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도 매번 새로움을 찍어야 하는 사진을. 사카이미나토 출신의 ‘우에다 쇼지’는 죽을 때까지 돗토리현에서 활동했다. 물론 전시실에 들어가 보면 해외여행 중 남긴 작품도 종종 볼 수 있지만 주로 돗토리 사구를 비롯해 돗토리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다수 남겼다. 

우에다 풍 사진 기법을 엿볼 수 있는 우에다 쇼지 사진미술관
우에다 풍 사진 기법을 엿볼 수 있는 우에다 쇼지 사진미술관

피사체를 마치 오브제처럼 배치한 사진은 ‘우에다 풍(Ueda Cho)’이라는 사진 연출법을 남겼다. 짧은 단발의 소녀들이 무심히 서 있는 흑백 사진은 몽환적이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어쩐지 아련한 그리움이 전해졌다. 나도 모르게 콧등이 시큰해지는 기분이 든다. 다이센산이 보이는 큰 창은 기념사진을 찍는 곳이다. 우에다 쇼지의 피사체가 된 것처럼 동그란 모자 아래서 개성 있는 포즈로 사진을 남겨 보자. 미술관 투어의 마침표다.  


돗토리현은 도자기로도 유명하다. 그 명성은 우연히도 스타벅스에서 발견했다. 돗토리 사구와 푸른 바다를 새겨 놓은 것만 같은 도자기 머그잔이 눈에 띄었다. 꽤나 비싼 가격이었지만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특별하니까. 공장에서 찍어 낸 일반적인 시티 머그잔과는 완전히 다른, 핸드메이드 도자기라 맘에 들었다. 

도자기 기념품과 따뜻한 음식을 함께 판매하는 이와이 가마의 하나 카페
도자기 기념품과 따뜻한 음식을 함께 판매하는 이와이 가마의 하나 카페

돗토리시 바로 옆 이와미군에는 50년 넘게 도자기를 만들어 온 ‘이와이 가마’가 위치한다. 이와이 가마가 얼마나 유명한지 물었더니, ‘산인 관광열차의 세면대도 이와이 가마의 작품’이라고 답했다. 돗토리현의 민예품 중 상징성이 높다는 뜻이다. 


입구에서 아키타견, ‘하나’가 꼬리를 천천히 흔들고 있었다. 하나는 이와이 가마의 카페 이름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맛볼 수 있는 투박하고 묵직한 뚝배기에 담긴 유바조스이에는 건강을 고려한 주인장의 마음이 담겨 있다. 걸쭉한 영양죽 같다. 돗토리 바다에서 나는 해초인 모즈쿠와, 두유와 콩가루를 끓일 때 생기는 얇은 껍질을 말린 식자재인 유바를 아낌없이 넣었다. 바다와 흙의 단백질이 한군데 어우러진, 100% 돗토리 향토음식이다. 담백한 맛이 수수한 도자기와 닮았다. 아틀리에에는 다양한 도자기 컬렉션이 있어서 기념품을 살 수도 있다. 


●도자기의 옛 실리콘밸리   
오카와치야마

340년 전, 오카와치야마는 도자기의 실리콘밸리였다. 
도공들은 이곳에 모여살며 도자기에 자신의 예술적 숨결을 불어넣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 숨결의 흔적을 따라가는 일이다. 

오카와치야마의 도자기에는 도공들의 혼과 숨결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오카와치야마의 도자기에는 도공들의 혼과 숨결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조선의 도공 이삼평에서 비롯된 도자기 마을로 일본의 한국애도 느낄 수 있는 이마리시, 오카와치야마는 그곳에서 가장 안쪽의 산간벽지에 자리해 있다. 이 작은 오지마을에 도착하니 바람결을 타고 도자기 풍경 소리가 들려온다. 마을에 들어서려면 도자기 다리를 하나 건너야한다. 도자기로 화려하게 장식한 다리 하나만으로도 이곳의 예술적 분위기는 이미 짐작된다. 숨겨진 가마터, 즉 ‘비요의 마을’이라는 별칭이 잘 어울린다.

다리를 건너니 도자기 타일로 크게 만든 마을 지도가 보인다. 도공들을 지켰던 관문, 도공의 집, 가마터, 도공의 묘, 번요 공원 등이 표시돼 있다. 나베시마 가마를 포함해 30여 개의 가마가 곳곳에 있어 도공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임을 알 수 있었다. 340여 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품은 곳인 만큼 조용하고 정갈한 분위기라 덩달아 차분해진다.

1675년 사가 나베시마 영주는 도자기의 높은 품질과 기술력을 유지하려 애썼다. 당시 도자기 산업은 서양에서의 폭발적 반응에 힘입어 번성기를 맞았다. 도자기 제작 기술이 있으면 팔자를 바꾼다 할 정도로 큰 부를 쌓을 수 있었다. 당시에 도자기 기술은 현대 IT 기술과 맞먹을 만한 첨단 기술 산업이었던 셈이다. 때문에 영주는 그 기술이 밖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아리타에서 험난한 지형의 오카와치야마로 가마를 옮겼다. 입구에 관문을 설치하고 도공들을 감시했다. 1871년까지 이곳에 일반인은 출입도 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생산된 도자기는 다이묘나 장군, 조정에 바치는 헌상품으로 ‘나베시마 도자기’라 불렸다.

경사진 마을길을 따라 산책에 나섰다. 마을 전체가 도자기 전시 및 판매장이지만 상업화된 느낌보다는 예술가의 작은 공방에 들른 느낌이다. 오카와치야마의 가옥을 살피다 보면 명패를 대신해 도자기 오브제를 세워 둔 것을 볼 수 있다. 도공들이 사는 도자기 마을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만큼 자신의 이름을 걸고 도자기를 만든다는 도공의 자세를 느낄 수 있다. 비요 마을에서 본 도자기는 백자에 빨강, 초록, 노랑 등으로 색을 입혀 화려하다. 이는 이마리 도자기의 특색이다. 1650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이마리야키를 처음 수출하면서 유명해졌는데 당시 유럽인들이 좋아했던 중국풍이나 유럽의 취향을 반영해 제작됐다. 또 아리타 도자기가 이마리 항구를 통해 수출되면서 통칭 이마리야키가 되었다 한다.

도자기와 도공들의 역사가 곳곳에 깃들어있는 오카와치야마
도자기와 도공들의 역사가 곳곳에 깃들어있는 오카와치야마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어귀에 다다르니 논밭이 눈에 들어온다. 벼가 노랗게 익어 간다. 마을 입구에 놓인 도자기 다리에 총총 박힌 꽃잎처럼, 자기를 뜨겁게 구워 내는 가마 속의 불길처럼 붉은 해가 마을을 감싸고 있다.

 

곽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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