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고 있어 일본여행] 자연이 건네는 위로에 몸을 맡기면
[기다리고 있어 일본여행] 자연이 건네는 위로에 몸을 맡기면
  • 곽서희 기자
  • 승인 2021.01.08 15: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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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periences in JAPAN Nature
니가타의 천연 원시림, 사사가미네 고원
니가타의 천연 원시림, 사사가미네 고원

가슴 깊이 박혀있는 여행의 순간들을 떠올려본다. 여행지는 제각기 다양해도, 배경은 대체로 도심보다 자연이다. 유명 맛집에서 대기표를 받고 1시간 넘게 줄을 선 기억은 흐릿해도, 안개가 자욱한 산 속에서 가쁜 호흡으로 자전거를 탔던 기억은 또렷하다. 일상에서도 종종 그렇다. 복잡한 네온사인 간판보단 해질녘의 은은한 석양빛에, 쇼핑몰의 화이트 대리석 벽 대신 새하얗다 못해 푸른 설원에 마음이 이끌린다. 낑깡밭까지 일구진 못하더라도 아파트 담벼락보다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창문이 좋을 때가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인간은 다른 누군가를 위로하는 데 영 소질이 없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고. 상대를 위하는 말들은 의외로 텅 비어있을 때가 많고, 또 자주 빗나간다. 북적이는 군중 속에서 고독감이 심화되는 순간. 자연이 주는 위로에 몸을 맡겨야 할 타이밍이다. 자연의 풍경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마음의 짐을 덜어준다. 몇 해 전 뉴질랜드의 한 초원에서 멍하게 서 있을 때였다. 머리 위에 수직으로 내리쬐는 햇볕도 수고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따뜻한 손길처럼 느껴졌었다. 빨갛게 타버린 양 어깨도 지금은 그리운 추억으로 남았다.. 언젠가 또 여행이 시작된다면, 그때의 여행지는 망설임 없이 자연이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기록  
돗토리


시간은 한 번 흐르면 사라짐에도 자꾸만 흔적을 남긴다. 
돗토리현에는 고운 모래와 우뚝 솟은 산으로 불멸을 새겼다. 
우리가 닿지 못한 과거를 자연을 통해 바라보게끔 한 시간의 배려다. 

돗토리의 사구는 10만년의 세월이 빚어낸 걸작이다
돗토리의 사구는 10만년의 세월이 빚어낸 걸작이다

10만년 세월의 흔적


돗토리현은 사구로 기억된다. 그 사구는 시간의 결집을 바탕으로 한다. 바람을 탄 모래가 모이고 모여 사구가 된다. 사구를 버무리는 시간과 바람은 끈질기고 신중해, 바위가 모래가 될 때까지 기꺼이 기다리고, 바람에 실릴 수 있는 입자만을 골라서 나른다. 그래서 사구의 모래는 가볍고 또 고르다.


돗토리 사구는 멀고, 높은 곳에서부터 왔다. 산맥에서 발원한 센다이가와강이 돗토리 사구의 근원이다. 부대끼고 부서진 바위는 자갈이 되고, 으깨지고 갈라진 자갈은 사구 앞 바다에 이르러 모래가 된다. 겨울철 바다의 거친 파도와 북서풍은 그 모래를 나르고 날랐다. 


10만년의 시간과 바람은 그렇게 돗토리 사구를 빚어냈다. 해변을 따라서 약 16km, 육지를 향해서 2.4km 펼쳐진 거대한 모래조형물이다. 10만년 전부터 모래가 쌓이기 시작했는데 이후 화산 폭발로 분출된 화산재가 그 위를 차지했다. 돗토리의 명산 다이센산의 화산재는 물론, 멀리 규슈의 가고시마 화산재까지 쌓여 있다고 한다. 현재의 사구는 약 1만년 전부터 화산재 위에 다시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저 아래부터 기반암-퇴적층-고사구-화산재-신사구가 켜켜이 층을 이루고 있다. 사구 미술관 뒷산 절개지에는 그 단층의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 신비롭다. 일본의 다른 곳에도 사구가 있지만 돗토리 사구만큼 제대로 보존된 곳은 없다고 한다. 돗토리 사구를 포함한 이곳 산인해안(Sanin Kaigan Geopark)이 일본 최초의 지오파크(Geopark)로 지정된 데 이어 2010년에는 세계지질공원으로 공식 인증된 이유다. 그만큼 지질, 지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돗토리 사구에 오르니, 10만년의 시간은 이미 소멸했음에도 그 아득함이 남긴 사구는 실체로서 불멸하고 있음을 느꼈다. 수백만년 동안 진화해 온 인간의 발자국이 모래 위 여기저기 남아서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돗토리 사구에는 여러 겹의 시간이 교차했고 지금도 계속해서 쌓이고 있다.

낙타 타기, 세그웨이 등 사구를 즐기는 방법도 다양하다
낙타 타기, 세그웨이 등 사구를 즐기는 방법도 다양하다

사구 동쪽 입구 언덕에 오르면 육지 깊숙이 파고든 사구가 저 멀리 동해 바다와 함께 한눈에 들어온다. 그 풍경 속에는 아련한 무엇인가가 함께 묻혀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일정한 패턴으로 계속된 바람의 고집은 사구에 다양한 표정을 선사했다. 솟구쳤다가 가라앉고 드넓게 펼쳐지기를 반복한다. 그 굽이마다 모래산과 모래호수, 모래평야가 터를 잡았다. ‘말의 등’으로 불리는 언덕은 40m로 우뚝하고, 그 밑으로는 ‘오아시스’가 잔잔한 호수처럼 물을 머금고 있다. 너른 평야에는 사구에서만 볼 수 있는 사구 식물들이 자라며 독특한 풍광을 만들고 있다.


사구 속으로 들어가면 바람과 모래의 협연이 펼쳐진다. 풍속과 풍향에 맞춰 사구 표면은 물결처럼 일렁이며 ‘풍문’을 그려내고, 이물질을 이고 있어 바람에 휩쓸리지 않은 모래는 작은 기둥처럼 ‘사주’로 남는다. 비탈에 아슬아슬 쌓였던 모래덩이가 일시에 무너져 내리면 모래 사면을 따라 파도 같은 ‘사렴’이 흘러내린다. 사구의 생동감이다. 


돗토리 사구는 지금도 온전히 남아있는데, 돗토리 사람들의 애정이 큰 버팀목이었다. 사구는 한때 생명력을 잃었다. 과거처럼 충분한 모래가 공급되지 않는데다가 각종 외래 식물들까지 침투해 모래의 자연스러운 이동과 흐름을 막았기 때문이다. 그대로 방치됐다면 돗토리 사구는 소멸했을 것이다. 돗토리 사람들은 지금도 매년 정기적으로 외래식물종 제초 활동을 벌이는 등 돗토리 사구에 갖은 애정을 쏟고 있다. 그 애정은 돗토리 사구의 불멸에 대한 희구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돗토리 사구를 색다르게 즐기는 법도 찾아냈다. 낙타를 타거나, 세그웨이와 두꺼운 타이어의 팻 자전거로 모래를 가르며 달릴 수 있다. 샌드보드와 패러글라이딩(3~12월)으로 더 큰 스릴을 만끽할 수도 있다. 심신을 단련하고 싶다면 모래 언덕 요가 프로그램에 참여해도 좋다. 사구의 역사와 지층 구조를 깊게 알고 싶다면 표본과 영상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방문자 센터에 들르면 되고, 각종 모래 조형물을 감상하려면 사구 인근의 미술관에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돗토리 사구 관광안내 sakyu-vc.com/jp

다이센산과 호수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다이센 레이크 호텔
다이센산과 호수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다이센 레이크 호텔

소의 역사, 다이센산


다이센 지역은 물도, 공기도, 하늘도 모든 것이 맑다. 특히 다이센산은 후지산, 야리가타케산과 함께 일본의 주요 명산으로 꼽힌다. 메이지 시대까지 산악 불교의 신성한 장소로 여겨 입산이 금지된 곳이었다. 성지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돗토리현의 유제품과 규코츠 라멘의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다이센산은 소와 인연이 깊다
다이센산은 소와 인연이 깊다

다이센산은 우마 시장으로 역사가 깊다. 메이지 시대에는 연간 1만 마리 이상이 거래되는 일본 최대의 우마 시장이었다. 푸른 초원에는 여전히 소와 말을 방목해 키운다. 산지의 녹초를 먹고 자란 소의 젖은 돗토리현 특산품인 고급 유제품으로 탄생한다. 우리나라 백화점의 프리미엄 푸드 코너에서도 소량 판매할 만큼 품질이 우수하다. 특히 여름이면 다이센 목장의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먼 곳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여행자들로 북적거린다. 다이센 목장 우유 마을에서는 젖 짜기 체험, 버터와 아이스크림 만들기 체험도 할 수 있다. 

다이센지절
다이센지절

다이센산의 최고봉인 미센의 해발고도는 1,709m로 주고쿠 지역에서 가장 높다. 인공 레포츠 시설이 많지 않은 돗토리현에서 다이센 스키장은 현지인들에게 인기 만점.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려 만든 골프 코스도 있다. 너도밤나무 숲이 우거진 산길을 따라 산책이나 등산을 즐겨도 되고, 여름에는 잔잔한 호수에서 카누에 몸을 싣고 신선처럼 둥둥 떠다니기만 해도 좋다. 


근처에서 하루 머물러야 여행의 마침표도 완벽하다. 호수와 산의 풍경을 앞에 둔 다이센 레이크 호텔이 제격이다. 호텔의 마스코트인 대형견 그레이트 피레니즈, ‘가이나’가 가장 먼저 손님을 반긴다. 스위스 산장풍의 호텔의 객실은 맑고 투명한 호수와 산 뷰를 제공하고, 제철 채소와 돗토리 유제품, 소고기가 나오는 프렌치 코스로 여행자의 입맛도 사로잡는다. 나트륨 함량이 높아 피부 미용에 좋다는 아담한 다이센 캬라 온천도 빠트릴 수 없다. 

 

●대원시림  
니가타


하얀색만 어울릴 줄 알았던 니가타에서 초록색을 찾았다. 
그것도 사람 손이 많이 닿지 않아 싱싱함이 그대로 남아 있는. 니가타를 여행하는 데 있어 우리가 준비할 것은 ‘걷겠다’는 의지뿐이다. 

니가타현은 설국의 배경이지만 묘코산 같은 초록색 자연 풍경도 여럿 있다
니가타현은 설국의 배경이지만 묘코산 같은 초록색 자연 풍경도 여럿 있다

니가타현 하면 사실 설국의 배경, 사케 등이 먼저 떠오른다. 눈과 연관이 깊어 보관창고도 눈을 이용할 정도니 다른 건 그저 곁다리로 생각된다. 설실에는 쌀은 물론이고 무와 당근 같은 채소, 와인도 보관한다. 이러한 이미지 때문에 흰색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지만 푸르른 초록색을 빠트리면 섭섭한 곳이 니가타현이다. 


니가타현은 일본의 100대 명산에도 뽑힌 묘코산을 비롯해 수많은 명품 자연경관이 있다. 그중 묘코 고원 서남쪽에 있는 해발 1,270m의 사사가미네 고원은 일본 원시림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아직 한국인 관광객이나 등산객은 물론이고, 외국인 방문객 자체가 많지 않아 여행자에게 도전 정신을 일으키는 미지의 세계다.


고원에는 수령 300년이 넘는 가문비나무가 빽빽하게 늘어서 있고, 6월이면 약초 꽃이 아름답게 피어난다. 10월부터는 서서히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특히 여름철에는 산 아래와 비교해 기온이 낮아 걷기에 무리가 없다. 4시간 정도의 트레킹 코스가 마련돼 있는 만큼 시간을 여유롭게 두고 방문해야 한다. 1~2시간으로는 아쉬움만 남을 뿐이다.

묘코 고원 서남쪽에 위치한 해발 1,270m의 사사가미네 고원
묘코 고원 서남쪽에 위치한 해발 1,270m의 사사가미네 고원

사람의 손이 덜 닿은 만큼 원숭이 같은 야생 동물도 제법 있다. 게다가 사사가미네 고원에서 ‘곰 주의’라고 쓴 팻말을 여기저기서 쉽게 볼 수 있다. 트레킹을 준비하는 몇몇 등산객의 배낭에서 딸랑딸랑 종소리가 난다. 고원 사무소 안내인이 ‘곰이 종소리를 싫어한다’고 귀띔해준다. 그렇다고 너무 겁먹지는 말자.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금세 사사가미네 고원의 매력에 푹 빠지기 때문이다. 이곳에선 나무며 풀이며 바위, 숲속의 모든 존재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생동감이 느껴지고, 나무와 풀의 소리도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들린다.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자연의 영험한 기운이 몸을 휘감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러한 풍부한 자연 외에도 사람이 관여한 흔적도 찾을 수 있다. 목장, 댐이 있고, 캠핑을 즐길 수도 있으니 염려 말고 열린 마음과 튼튼한 신발만 챙겨 고원으로 향하자. 


●파도가 깎은 비경  
와카야마


2시간도 채 안 걸리는 간사이에는 오사카, 교토만 있는 게 아니다. 여행자에게 파도와 바람이 만든 비경을 선사해줄 와카야마가 기다리고 있다. 단 몇 분으로 여행자를 홀리기 충분한 아름다움이다.
  

와카야마의 대표 해안 명소, 산단베키
와카야마의 대표 해안 명소, 산단베키

오사카, 교토, 고베 등으로 유명한 간사이 지방이지만 와카야마현은 아름다운 풍광으로 자신만의 캐릭터를 단단히 구축했다. 그중에서도 바다와 밀접한 와카야마의 시라하마 지역은 주상절리 같은 파도와 바람이 만든 비경을 품고 있다. 


주인공은 엔게츠도, 산단베키, 센조지키 삼총사다. 사실 엔게츠도의 정식 명칭은 다카시마다. 그렇지만 해안 침식 작용으로 가운데에 직경 약 9m 정도의 둥근 모양의 해식동굴이 생겼고, 그 모양이 엔화의 동전 구멍과 비슷하다 해서 엔게츠도라는 애칭이 붙었다. 섬의 동그란 구멍 안으로 펼쳐지는 일몰의 장관을 보는 게 포인트다. 한 번에 만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너무 실망하지는 말자. 거센 비바람과 지진이 나도 엔게츠도가 무너지지 않도록 진작에 보전 공사를 마쳤으니 말이다. 엔게츠도는 언제나 이곳에서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센조지키와 산단베키 절벽을 연달아 만날 수 있다. 센조지키는 1,000장의 다다미를 깔아 놓은 것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부드러운 사암이 거센 파도와 바람에 지속적으로 깎여 지금의 형상이 됐다. 실제로 보면 광활하고 푸르른 태평양을 배경으로 연갈색 계단식 사암이 펼쳐져 수채화를 보는 기분마저 들게 한다. 그야말로 자연이 만들어낸 보색의 조화다. 높은 바위에서 보는 일몰이 특히 아름다워 일본인들도 많이 찾는다. 

산단베키 내에 위치한 사찰
산단베키 내에 위치한 사찰

산단베키는 높이 약 50m의 절벽이 2km에 걸쳐 이어지는 주상절리 암벽으로 와카야마를 대표하는 해안 명소다. 시리도록 푸른 바닷물이 암벽에 부딪치면서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저 멀리 반짝이는 물별이 보이고, 그보다 가까운 곳에는 속까지 투명한 바닷물이 보인다. 이곳 지하 36m 아래로 형성된 산단베키 해식 동굴도 함께 보면 더욱 좋다. 오랜 세월 거친 파도의 침식 작용으로 만들어진, 내부가 약 200m에 달하는 동굴이다. 천장에는 지층에 묻혀 있다가 다시 드러난 해저 모래와 진흙 무늬가 새겨져 있다. 동굴 안에서 코앞까지 달려드는 매서운 파도를 보았을 때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절로 든다.

 

곽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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