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4,000㎡에 이르는 거대한 절터, 중원미륵리사지.
발길에 채이는 돌조각 하나 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절터 주변 이곳저곳에 제멋대로 나뒹굴
고 있는 역사의 편린들. 먼 옛날 이 녀석들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호기심이 절
로 솟아오른다.

제 몸집의 몇 곱절이나 되는 기둥을 당당히 떠받치고 있었을 주춧돌이며 세월의 풍파에 이
끼가 서리고 까맣게 타버린 옛 석공의 미완성 석조물, 몸뚱아리는 어디에 내팽개쳤는지 머
리 부분만 남은 석불의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 그 미소 위에 언제 다녀갔는지 모를 많은 이
들의 소원과 염원이 작은 돌탑이 되어 남아 있다.
무엇이 서 있던 자리인지 알수는 없지만 간신히 그 존재의 흔적만을 어렴풋하게 남긴 거대
한 건물터가 시선을 잡아끈다.
그리고 사방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각양각색의 파편들이며 돌덩어리들이 잠들어 있던 상
상력을 흠뻑 자극한다. 마치 퍼즐조각 맞추기 게임이라도 하듯 머릿속은 이 녀석들을 이리
저리 맞춰 보기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저 퍼즐조각들을 다 맞추고
나면 무언가 대단한 모습일거라는 막연한 기대감과 신비감만 더해 갈 뿐이다.
옛부터 서울과의 수로교통이 발달해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충주. 그래
서 옛 지명은 한반도의 중심지란 뜻으로 ‘중원’이라 불렸다. 또 현재의 충주(忠州)라는 지
명도 이런 맥락에서 ‘중(中)’과 ‘심(心)’, 즉 중심(中心)이라는 단어가 하나로 합쳐져
‘충(忠)’을 이뤄 탄생했다는 풀이도 있다.
신라말에서 고려초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중원미륵리절터(사적 제317호)는 바로
이곳 한반도의 중심 충주에 자리잡고 있다.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월악산국립공원 자락에
다소곳이 안겨 있어 제법 운치가 감돈다. 더군다나 절도 중도 없는 폐사지다. 그래서 더욱더
정감이 가고 고적한 느낌을 더하는지도 모른다.
절도 중도 없는 폐사지라고 해서 찾아오는 객을 냉대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랜 세월 묵
묵히 절터를 지키고 있는 거대한 돌거북을 비롯해 보물 제95호인 5층석탑과 제96호인 석불
입상 그리고 단아한 맛을 풍기는 석등 등이 일렬종대로 서서 방문객들을 반겨주기 때문이
다.
우선 미륵사지 초입에 들어서면 그 크기에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올 정도로 거대한 귀부(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가 ‘떡’하니 방문객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 크기도 크기려니와 세월
의 흐름을 증명하듯 거북등 여기저기에 피어오른 희끄무레한 이끼에 절로 숙연해진다. 안타
까워진다. 길이가 6.5m 나 되는 국내최대귀부라는 명예가 무색하게 이젠 집도 주인도 없는
쓸쓸한 폐사지를 지키고 있는 신세가 되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거북등에 우뚝 솟아있었을 비석은 온데간데없다. 그저 거북등의 움푹 패인 자리만이
‘이래봬도 한때는 커다란 비석을 업고 있었지’라며 옛 영화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아
처량한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감상에 젖는 것도 잠시. 곧바로 한가지 뚜렷한 의구심이 뇌리를 스친다. 도대체 이곳
은 어떤 곳이었기에, 또 누가 무슨 목적으로 세웠기에 이렇듯 거대한 귀부와 비석이 필요했
던 것일까. 막연한 기대를 갖고 바로 위에 차례대로 자리잡고 있는 5층석탑, 석등, 석불입상
을 찾아보지만 거대한 귀부에서 싹튼 의구심은 좀처럼 사그라들거나 해소되지 않는다. 해소
는커녕 오히려 커져만 간다.
이 절에 대한 역사적 문헌이나 기록이 거의 없는데다 절까지 사라졌기 때문에 현재로선 정
확한 건립시기 및 의도, 주체세력 등에 관해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이곳 5층석탑의 양식은 경주의 석탑양식과 유사한 반면 석불입상은 고려시대의 전형적
인 양식을 취하고 있는 등 신라와 고려의 양식이 혼재돼 있다는 사실에 미뤄,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로 건립시기를 추정할 뿐이다.
특히 석불입상의 동글동글한 얼굴에 납작한 코, 온화한 미소와 갓을 쓰고 있는 모습은 고려
시대 석불양식의 전형이다. 또 이곳 1만4,000㎡ 에 이르는 터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는 팔각
석등이나 삼층석탑은 완연한 통일신라 때의 조각수법임이 밝혀져 이러한 추정을 더욱 뒷받
침하고 있다. 그러나 완전한 정사는 아니다.

중원미륵사지에 얽힌 전설
“아는 만큼 느낀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씨의 말이다. 같은 대상이더라도 감상하는 이의 문
화적 지식이나 교양수준에 따라 제각기 해석된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한마디로 제대로 알
고 있어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말을 바꿔야겠다.
“모르는 만큼 흥미롭다.”
중원미륵리사지에 관한 기록이 빈약하다 보니 방문객들은 맘껏 문화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아직까지 이렇다할 정답은 없는 것이다.
각자의 상상력과 지식을 바탕으로 이 거대한 절터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모습뿐만 아니
라 그 역사적 배경과 사건들까지도 논리에 맞고 근거가 충분하다면 하나의 설(?)이 될 자격
이 있는 것이다. 중원미륵리사지에 관한 여러 전설이 이를 뒷받침한다.
우선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던 중에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마의태자는 국가탈환의 염원을 품고 월악산에 미륵과 석탑
을 지었는데 중원미륵사지의 석불입상과 5층석탑이 바로 그것이라고 보는 전설이다.
또 그의 누이 덕주공주가 지었다는 덕주사와 자신의 모습을 돌에 새겨 남긴 것으로 전해지
는 마애불(보물 406호)은 유명하다. 이 전설은 중원미륵리사지가 국내에서는 드물게 북향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연계돼 가장 유력한 전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북쪽을 향한 미륵리 석
불입상이 덕주사와 마주보고 있기 때문이다.이 외에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 중원지방의 신
라 호족세력을 달래기 위해 지었다는 설이 있는데 믿을만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또 개울건
너 5층석탑 맞은 편에는 설악산의 흔들바위를 연상시키는 둥그런 돌덩이가 있는데 이곳 사
람들은 이를 가리켜 온달장군이 가지고 놀던 ‘공깃돌’로 부른단다.
이미 형성된 전설에 각자의 상상력을 조금만 더 가미하면 보다 더 흥미로운 설도 어렵지 않
게 탄생할 듯 싶다.
마치 거대한 야외 석공예품 전시장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절터와 그 주변 곳곳에
제멋대로 산재돼 있는 주춧돌, 머리만 뎅그러니 남은 석불, 기둥조각들 등을 맞춰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를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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