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익숙하다. 거리풍경이며 사람들 생김새며 이국땅이 아니다. 운전석이 왼쪽에 붙은
자동차와 창밖을 스쳐가는 일본식 전통가옥, 1시간 정도 몸을 실었던 비행기의 기억을 빼면
한국의 제주도쯤에 와 있는 느낌이다. 여기는 서일본이라고 불리는 규슈의 나가사키현, 거기
서 두번째로 큰 도시 사세보(佐世保). 유명한 테마 리조트 ‘하우스텐보스’가 있는 바로 그
도시다.

작은 항구 도시‘사세보의 봄’
세계 최초의 해상 공항이라는 나가사키공항에서 버스로 1시간쯤 달리니 사세보에 도착한다.
도시는 해안선을 따라 둥근 반원을 그리며 이어진다. 공항을 떠나 어디로 가든지 꾸불꾸불
리아스식 해안과 비취색 바다가 뒤를 쫓는다. 바다는 새로울 것이 없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낯설어지는 것은 이 바다의 고요함이다.
명치시대부터 해군진수부가 설치되어 러·일 전쟁, 제1·2차 세계대전을 견디는 동안 이 도
시를 거쳐갔을 파란을 생각하면 저 비취색의 잠잠함은 이상하기만 하다. 여기저기 비명소리
와 대포소리가 퍼지고 피로 물든 붉은 바다의 환영이 일어난다. 나가사키에 투하됐던 원폭
투하의 기억까지 겹쳐진다.
지금도 사세보의 바다위에는 미군해군기지, 해상자위대가 주둔하고 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인가 싶지만 우리나라처럼 바닷가를 둘러싼 철조망 따위는 없다. 짧은 머리의 미군들은
자유분방하고 사람들은 평화로울 뿐이다. 근래까지 군항으로 성장하였고 한때는 번성한 조
선업의 중심지였던 이 도시는 이제 어엿한 관광도시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사세보의 동·서쪽에는 천연의 아름다움과 인공의 아름다움이 대조를 이룬다.
동쪽에는 크고 작은 섬이 늘어서 다도해 국립공원 ‘쿠주쿠시마’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오
무라만을 메워 설립한 인공도시 ‘하우스텐보스’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170개의 섬 ‘쿠주쿠시마’
쿠주쿠시마는 99도라는 뜻이지만 실제로 이 곳에는 170여개나 되는 섬이 자리잡고 있다. 그
사이를 운항하는 유람선 ‘해왕’은 사세보의 상징이다.
일행이 ‘해왕’을 타기위해 ‘펄 씨 리조트’를 찾았을 때 좀처럼 흔치 않은 쾌청한 날을
맞았고 덕분에 작은 요트를 타보는 행운을 누렸다. 영화나 TV광고에서나 보았던 풍경. 다
들 번갈아 키를 잡아보고 선장노릇에 신이 나지만, 장난끼 많은 진짜선장 할아버지는 밧줄
을 당겨라, 풀어라 중노동을 시킨다.
요트를 타고 쿠주쿠시마를 누비면 좌우로 갖가지 섬들의 비호를 받게 된다. 하나를 만나면
다시 하나가 나타나고, 거기에 시선을 빼앗기다 보면 저 멀리 콩알만하던 섬이 어느새 앞길
을 막아선다. 새를 닮은 섬, 사자를 닮은 섬, 모양도 가지각색이다. 일일이 인사하고 눈도장
을 찍다보니 1시간이 훌쩍 지난다.
돌아가는 길에 ‘쿠주쿠시마’(99도)에 얽힌 전설하나가 소개된다.
어느날 밤 100개의 섬이 모여 한 해를 마무리하는 축제를 벌였다. 제일 작은 섬이 술심부름
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홀짝 홀짝 술을 마셨고 이내 잠이 들었다. 깨어나보니 축제의 밤
은 끝나 버렸고 작은 섬은 다른 섬들의 질책이 두려워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전설은 짧아도 돌아오지 못한 그 무엇에 대한 그리움은 길다. 작은 섬이 돌아오지 못한 그
자리에 애틋한 추억 하나 던지니 어느새 섬이 되어 남았다. 세월에 밀려 배는 떠나가고 사
람들은 각자의 그리움에 출렁거렸다.
‘쿠주쿠시마’의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버스는 서둘러 산으로 올라갔다. 사세보는
도시전체가 둥근 해안선을 따라 형성되었으니 집은 산으로 올라가고, 높이 올라갈수록 바다
는 넓고 멀리 보인다. 도시 중부의 산 정상에 위치한 ‘유미하리 전망대’에 올라가니 좀
전에 누비고 다녔던 ‘쿠주쿠시마’가 한눈에 보인다. 짧은 이동시간동안 날씨가 흐려져 시
야가 뿌였지만 아까 만난 섬 하나하나를 짚어보며 마지막으로 이별의 정을 나눴다.

‘낭만의 거리’ 하우스텐보스
하우스텐보스는 사세보시의 동쪽에 위치한 일본 최대의 테마 리조트다.
오무라만을 메꾼 142만평의 땅 위에 17세기 네덜란드의 거리와 건물을 그대로 재현했다. 하
우스텐보스는 ‘숲속의 집’이란 뜻. 일본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던 네덜란드와의 오랜 수교
역사를 기념하는 동시에 새로운 미래형 도시의 실현을 위해 건축되었다.
하우스텐보스는‘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고려하여 광활한 녹지를 조성하고 숙박시설, 쇼핑
점, 레스토랑뿐만 아니라 은행 등 공공시설, 박물관, 스포츠 시설 등 오락시설을 완벽하게
갖춘 인공도시다. 전력공급이나 상·하수 시설도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흔히들 하우스텐보스를 ‘일본속의 유럽’이라고 한다. 유럽식 건축물에 유럽의 음식, 의상,
기념품, 그리고 유럽식 서비스까지 네덜란드인조차 똑같다고 말한다.
이 환상의 도시 하우스텐보스의 연간 방문객은 400만명. 그 중 일본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90%에 이른다. 나라안에 또 다른 나라를 고스란히 재현해 방문하곤 하는 이 사람들의 치기
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문득 궁금해진다. 일본인에게 하우스텐보스는 어떤 곳인가? 그들은
하우스텐보스에서 무엇을 할까?
카즈코 사이조씨는 도쿄 근처의 비와(Biwa) 호숫가에 사는 체육교사다. 하우스텐보스에 오
기 위해 다섯시간이나 고속열차를 탔다고 한다. 함께 온 딸과 딸의 남자친구는 어디로 갔는
지 그는 호텔 ‘유럽’의 로비에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사이조씨가 먼 거리를 마다않고 이 곳을 선택한 이유는 ‘유럽을 느끼고 싶어서’다. 일본
속의 유럽이라는 말은 그냥 홍보문구가 아닌 모양이었다.
17세기 네덜란드를 빼다박은 이 곳의 거리를 산책하고 호텔에서 와인에 치즈를 곁들이는 것
으로 그는 이 작은 유럽에서의 반나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 시간동안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은 지천으로 깔린 튤립꽃.
그가 극찬했던 튤립 꽃은 단연 하우스텐보스의 자랑이다. 이 곳에서만 자라는 개량종 튤립
이 있을 정도. 잎끝에 촘촘한 가위집을 넣은 것처럼 펄럭펄럭 거리는 이 꽃은 이름이 ‘하
우스텐보스’다. 하우스텐보스는 4월이 되면 더욱 만발해질 튤립과 함께 40만그루의 나무,
30만 그루의 꽃이 자라는 곳이다. 바닷가에 세워진 거대한 숲과 같다.
사이조씨는 디즈니랜드처럼 즐길 거리가 많지 않아 섭섭하다고 했지만 유럽귀족이 된 것처
럼 낭만적인 저녁시간을 보낸 것이 매우 만족스러운 눈치다.
호텔 유럽을 숙박지로 정한 것도 그곳이 가장 유럽적이기 때문이란다. 하우스텐보스에 있는
4개의 호텔 중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호텔 유럽은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암스테르담의 고급
호텔을 재현한 것이다. 호텔 크루저가 있어서 배 위에서 직접 체크 인·아웃이 가능하고 정
통 유럽스타일의 서비스가 제공된다.
1박2일의 짧은 일정으로 ‘유럽’을 방문한 그는 언젠가 진짜 네덜란드를 가보고 싶다고 말
했다. 유럽에는 있는데 하우스텐보스에는 없는 것. 그는 ‘역사’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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