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싣는 순서
Ⅰ. 잉카의 후예 페루
① 남미의 관문 리마
② 잉카문화의 중심 쿠스코
③ 불가사의한 공중도시 마추피추 上
④ 불가사의한 공중도시 마추피추 下

Ⅱ. 좋은 날씨·여자·와인의 나라 칠레
① 유럽풍의 차분한 도시 산티아고
② 칠레의 아카풀코 비냐 델 마르
③ 화산과 호수의 도시 푸에르토 몬트

Ⅲ. 한국 속 남미 중남미문화원

‘세계의 배꼽’쿠스코
동체가 좌우로 한 번 흔들하더니 황토빛 고원 도시가 비행기 밖으로 가득하다.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진 잉카. 그 아스라한 잔영을 붙들고 있는 쿠스코. 한때 잉카제국의 중심은 곧 세
계와 우주의 중앙이라는 호기로움도 부렸지만 이제 ‘엘 콘도르 파사(철새는 날아가고)’만
이 옛 향수를 자극하고 허허로운 마음을 달래준다.


사라진 역사의 그림자
리마가 현재세계의 중심이라면 쿠스코는 과거세계의 중심이다. 현세가 아닌 과거의 중심이
라 어딘지 서글프다. 해발 3,400m가 넘는 지역에 위치한 쿠스코에는 그만큼 산소가 엷은데
이제 희박한 건 산소만은 아닌 듯했다.

이질의 문화가 덧씌워지고
융성하고 거칠 것 없었던 잉카문화가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파괴되고 뒤틀리고 또 꺾이면
서 역사의 저편으로 자취를 감췄다. 차라리 완전히 사라졌다면 무한 상상을 동원, 원판보다
훨씬 근사하고 거대한 그림을 그리며 자위하겠지만 침략자들은 앞서간 잉카문명을 완전히
절단낼 수 없었다.
정복자들의 문화보다 한수 위이기도 했지만 문명이라는 게 워낙 생명력이 질긴 놈이라 누르
고 부수고 생채기를 내도 좀체 나가떨어지지 않는 법이다.
대신 400년 넘게 자행됐던 스페인의 광포한 ‘잉카 박살내기’는 결과적으로 피지배자와 지
배자간의 기묘하고 부적절한 동거를 창출했다. 침략자들은 태양의 신전 안에 가득했던 황금
을 거두어 가고 그 위에 산토 도밍고 성당을 세웠다. 태양의 처녀집은 수녀원으로, 제국의
힘과 웅장함을 웅변하던 왕궁은 성당으로 바꿔 버렸다.
몸통 위에 이질적인 머리가 얹혀지고 본래의 의도에서 불순한 것으로의 강제 변형을 당했지
만, 잉카의 정신은 분명 은근하고도 유장한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딘가 하고 보니 대
성당의 주춧돌과 외벽이요, 도시의 집들과 토대, 또 골목의 담이었다.
오늘날 쿠스코에 살고 있는 인디오인 쿠스케노스들에게도 잉카는 아직 진행형인 영원한 제
국이다. 이들의 갈래 딴 머리며 전통의상은 물론이고 조상의 역사를 찾기 위해 벌이는 모금
운동도 그렇다.

거대한 돌을 공기돌 다루듯
직물과 염색, 황금세공과 더불어 잉카의 ‘3대 예술’로 불릴 만한 것이 바로 석조건축이다.
태양의 신전. 비록 상부는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훼손돼 그 원형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기
단을 비롯, 내벽과 외벽의 1층은 비교적 보전상태가 양호하다.
다른 걸 제쳐두고 쓰여진 석재의 크기가 우선 놀랍다. 그리고 나서 그 거석을 어떻게 운반
했느냐 하는 점에 생각에 미치면 역사의 미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채석장은 태양의 신
전이 있는 곳에서 수십 km나 떨어져 있는데 말이다. 더구나 잉카인들은 철기도구는 물론
바퀴 달린 수레를 전혀 이용하지 않았기에 호기심은 더욱 증폭된다(박스기사 참조). 거구의
돌을 공기돌 다루 듯한 솜씨도 경탄스럽기 짝이 없다.
각각의 돌들은 ‘바른 쌓기’로 정교하게 짜 맞추어져 있는데, 그 치밀함이 얼마나 대단하
던지 큰 돌 사이의 틈새에 얇은 종이 하나 들어갈 수 없을 정도다.
축조기법은 한발짝 더 나아가 과학적이기까지 하다. 상부로 올라 갈수록 보다 가늘고 좁혀
지기 때문에 강진에도 버틸 수 있는 내진공법의 요소가 가미됐다. 실제로 제국의 멸망 이후
두차례의 큰 지진이 쿠스코를 덮쳤을 때도 이곳만은 무사히 지나쳤다. 그러나 식민시대에
증축된 대부분은 쓰러졌으니, 잉카의 앞선 축조술에 새삼 경외감을 금할 길이 없다.

새로 태어나는 의식 ‘태양의 축제’
쿠스코 시내를 조금 벗어나면 제국의 수도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성채 유적지 삭사이후
아만이 나온다. 이곳의 돌들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큰데, 자연석이나 거칠게 처리된 마름돌을
가지고 ‘막쌓기’를 하여 높게 축조되었다.
큰 돌의 경우 보통 8개 이상의 돌과 맞물려 다양한 각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 역시 너무나
잘 들어맞게 축조되어 있어 처음부터 여기에 짜 맞추어 쌓을 수 있도록 태어난 돌인 것처럼
느껴졌다.
삭사이후아만의 역사적 의미는 해마다 6월이면 열리는 ‘태양의 축제’에서 찾을 수 있다.
잉카의 후예들이 그들의 태양을 숭배하는 한바탕 자리다. 잉카인들은 태양을 가장 성스럽고
절대적인 존재로 숭앙해서 태양이 사라지면 세상도 없어진다고 믿었다. 때문에 태양이 다시
떠오르는 일식은 세상이 다시 창조되는 것이며, 새로 태어난다는 의식이었다. 그들은 이때를
기하여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정성도 지극해서 의식을 직접 집례하는 잉카의 왕은 태양제 사흘전부터 금욕과 금식을 통해
몸과 마음을 정결히 했다.
제물로 바쳐지는 알파카는 귀족이나 추장들이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잘 생기고 연약
한 것 중에서 선택됐다.
지금도 태양제는 잉카시대의 의식에 따라 진행된다. 그러나 한 가지가 달라졌다. 아니 두 가
지다.
이제 태양제를 집행하는 사제는 잉카의 왕이 아니라 쿠스코 주민 가운데서 뽑힌 사람이며,
그리고 백성들 대부분은 인디오가 아니라 스페인의 후예들이다. 역사의 긴 호흡을 거치면서
도 형식은 살아남았지만 집행의 주체가 바뀌었으니, 먼발치서 이를 지켜보는 인디오들의 마
음은 착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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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 돌들을 옮겼을까’
‘돌 옮기다 수 천명 사망’연대기 기록 존재
‘유적지의 성격을 떠나 잉카의 건축가들은 어떻게 거대한 돌들을 운반한 것일까?’
잉카의 석조건출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품게 되는 의문이다. 문제의 초점은 ‘얼마
의 거리를 옮겼느냐’ 보다는 이론상으로 ‘정말 옮길 수 있었느냐’하는 점이다.
이 근본적인 문제만 풀 수 있다면 전자의 문제는 시간적인 부차적 개념일 뿐이다.
‘원주민 2만명이 잉카의 명령에 의해 큰 돌을 옮기려다 언덕에서 굴러 수 천명이 깔려 죽
었다’는 스페인 정복시대 연대기 학자들의 기록이 있다. 이는 잉카시대 성곽 축조시 거대
한 돌을 운반해와 쌓았다는 것을 방증해 주고 있는데, 원주민 사회의 구전적 이야기가 대부
분 과장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어쨌든 성을 쌓는 데 따른 피의 노동을 말해
준다.
실제 옮길 수 있었냐는 추론은 우리나라 고인돌과 간접 비교해 볼 수 있겠다. 고인돌의 경
우 수레가 아닌 통나무를 연이어 바닥에 깔아서 운반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고인돌 상
석 중 큰 것의 경우 20∼30t의 중량이 나간다. 성인남자가 약 100kg의 무게를 운반한다고
가정하면 이 경우 200∼300명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따라서 부족국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통치력과 인구를 가진 잉카제국의 경
우, 돌의 무게가 수 백t에 달하지만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란게 중론이다. 또 생존 차원에서
성곽이나 신전을 건설하는 것은 가능성 뿐만 아니라 당위로 이해해야한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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