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은 모난 데 없이 부드럽다. 
그곳에서 네 개의 곡선을 만났다. 
나를 사로잡은 순천의 곡선 이야기다. 

승선교 아치 속으로 강선루가 다소곳하게 안겨 있다
승선교 아치 속으로 강선루가 다소곳하게 안겨 있다

 

●천년고찰의 고즈넉한 곡선
선암사


순천 선암사에 이르는 1km 남짓의 숲길, 겁먹을 필요는 없다. 선암사를 품은 조계산 숲이 풍요로운 나무 터널을 내어주고 길 한편의 아담한 계곡은 소박하게 길동무가 되어주니 말이다. 느린 걸음으로도 20~30분이니 수고스러움보다는 오히려 짧음을 아쉬워해야 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조계종과 함께 한국 불교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이니 더욱 그렇다. 

선암사 대웅전과 삼층석탑
선암사 대웅전과 삼층석탑

선암사에 닿기 전 선암사보다 더 유명한 풍경을 먼저 만났다. 아치형 돌 무지개다리인 승선교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도 한다. 괜히 보물 400호로 지정했겠는가! 승선교 자체로도 매력이 가득한데 압권은 따로 있다. 승선교 아치 곡선 속으로 그 뒤편의 누각 강선루가 안긴 모습이다. 계곡으로 내려가 승선교를 올려다보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아치의 부드러운 곡선 속에 강선루가 다소곳하게 안긴 모습이 정말 운치 깊다. 순천의 순한 곡선이다.

 

선암사는 백제 성왕 5년(527년)에 아도화상이 해천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었고 그 뒤 9세기 통일신라 시대 때 도선국사가 그 자리에 중창해 선암사를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차밭을 운영하는 사찰로도 유명한데, 통일신라 때 도선국사가 일주문 주변에 차 나무를 심으면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일주문 앞에는 야생차 나무가 빼곡하다. 도선국사의 흔적은 또 있다. 일주문 앞에 있는 작은 연못 삼인당이다. 도선국사가 축조한 것이라고 한다. 타원형 연못 안에 작은 섬이 있는 독특한 구조인데, ‘모든 것은 변하여 머무른 것이 없고, 나라고 할만한 것도 없으므로 이를 알면 열반에 든다’는 불교사상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삼인당이 마치 우주 같았다.

 

천년고찰의 고풍스러움이 가득한 일주문을 통과하면 선암사 대웅전과 신라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삼층석탑 2기가 고즈넉하다. 대웅전 뒤로 크고 작은 전각들이 선암사를 이루는데, 전각들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왕벚꽃과 매화나무 같은 수목들도 선암사의 운치를 더한다. 특히 각황전 담길의 홍매화와 원릉전 담장 뒤편의 백매화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을 정도로 유명하다. 벚꽃 날리고 붉고 흰 매화 만개한 봄철에 다시 찾아야 할 이유다.

 

●성벽 안에서 순하고 또 순한
낙안읍성마을


성벽에 오르니 초가집 지붕이 오밀조밀한 모습이 정겹다. 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이다. 낙안읍성은 너른 평야에 높이 4m 너비 3~4m로 쌓은 총 길이 1,420m의 성벽이다. 1397년 일본군이 침입하자 처음 토성을 쌓았고 조선의 명장 임경업이 1626년 낙안군수로 부임하면서 현재의 석성으로 중수했다고 한다. 동내 · 서내 등 3개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현재도 100여 세대가 실제로 거주하고 있다. 민박, 찻집, 체험시설 등으로 관광객을 맞이하는 주민들도 많다.

 

낙안읍성마을의 성벽 누각
낙안읍성마을의 성벽 누각

성벽 길을 따라 걸으면서 마을의 원경을 즐겼다. 성벽 길은 어른 서너 명이 나란히 걸어도 좋을 만큼 꽤 넓지만, 떨어지면 크게 다칠 정도로 꽤 높으니 조심한다. 제법 높아서 마을 풍경을 감상하기에는 제격이다. 성벽 안쪽으로는 정겨운 마을 풍경이 펼쳐지고 바깥으로는 논과 밭이 이어진다. 마을 집들은 대부분 초가지붕이어서 정기적으로 지붕 이엉을 갈아야 한다. 마침 마을 주민들이 초가집 이엉을 새것으로 교체하고 있다. 이곳 아니면 어디에서 이런 풍경을 볼 수 있을까 감사하며 한참 구경했다.

옛날 옥사를 재현한 가옥
옛날 옥사를 재현한 가옥

낙안읍성을 여행하는 코스는 여럿이지만 성벽의 가장 높은 빈기등 언덕은 모두 빼놓지 않고 들른다. 이곳에서 마을 전체를 바라볼 수 있어서다. 제법 가파른 계단을 올라 언덕에 서니, 모나지 않은 네모 모양으로 부드럽게 마을을 감싸고 있는 성벽 안에서 마을은 순하고 또 순했다.

 

●나선형 오르막길을 오르면
순천만국가정원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열린 게 2013년이니 이미 시간이 꽤 흘렀지만, 순천만국가정원은 여전히 정갈하고 깔끔한 자태로 관람객을 맞았다. 순천만국가정원은 박람회 현장을 재단장해 2014년부터 영구 개장했고 2015년 9월에는 ‘대한민국 제1호 국가정원’으로 지정됐다. 지금도 박람회 당시의 모습이 거의 그대로 보존돼 있다. 13개의 세계정원과 14개의 테마정원 등 57개의 정원이 들어서 있으며, 각종 어류와 조류, 포유류를 만날 수 있는 생테체험관 · 야생동물원, 그리고 각종 편의시설이 92만㎡에 달하는 정원을 빛내고 있다. 

순천만국가정원 호수와 언덕들
순천만국가정원 호수와 언덕들

국가정원은 순천을 흐르는 동천을 사이에 두고 동-서쪽으로 나뉘는데, 동쪽에는 호수정원과 세계정원이 모여 있고, 서쪽에는 한국정원과 야생동물원 등이 있다. 워낙 넓다 보니 국가정원 구석구석으로 안내하는 관람 열차가 언제나 인기다. 관람 열차가 아니더라도 체력에 맞게 산책을 하듯 여유롭게 거닐면 그만이다. 세계 각국의 정원을 들르다 보면 마치 세계여행이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가장 인기가 높은 곳은 호수정원이다. 잔잔한 호수와 호수 중앙에 봉긋하게 솟은 봉화 언덕 덕분이다. 봉화 언덕은 나선형 길을 따라 사람이 오르내릴 수 있게 만들어졌다. 순천만 습지의 에스(S)자형 수로가 계속 이어지는 듯 자연스럽고 부드럽다. 봉화 언덕을 오르고 또 내리는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봉화 언덕에 오르면 호수와 호주를 둘러싼 국가정원이 아늑하게 펼쳐져 너나 할 것 없이 한참이나 바라본다. 

국가정원은 순천만 습지와 연계해서 관람할 수도 있다. 스카이큐브라는 국내 최초 소형무인궤도차가 두 곳을 연결한다. 국가정원 내 정원역에서 탑승하면 4.6km를 8~12분 동안 달려 문학관역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순천문학관이나 동천습지 갈대밭을 감상한 뒤 되돌아와도 되고, 1km 정도를 걸어 순천만 습지를 만날 수도 있다. 


2023년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동안 다시 이곳에서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열린다. 10년 만의 박람회는 어떤 감동을 선사할까, 벌써 기대감이 쌓이고 있다. 

 

●갈대숲 사이로 갯골 굽이도는  
순천만 습지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구인 순천만 습지는 세계 5대 연안 습지라는 명성에 걸맞게 널찍하고 평평하다. 갈대밭 규모가 5.4㎢에 이르고, 갯벌 면적은 22.6㎢에 달한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엄청난 크기의 습지는 수많은 생명을 품었다. 농게, 조개, 짱뚱어 등 수많은 갯벌 생물들의 터전이며 각종 철새가 오간다. 우리나라 유일의 흑두루미 서식지이기도 하다. 110여종의 식물이 자라고 갈대가 대규모로 군락을 이룬다. 온갖 생물들이 서식한다 해서 ‘생명의 소용돌이’라고도 불릴 정도다. 

갈대군락 사이로 수로가 굽이도는 순천만 습지
갈대군락 사이로 수로가 굽이도는 순천만 습지

습지 갈대숲 사이로 난 나무 데크 탐방로를 걸으면 자연스레 순천만에 스며든다. 갈대숲 사이로 갯골 수로가 굽이치며 흐르고, 가을날 갈대꽃은 햇빛을 은빛으로 튕겨내며 바람에 일제히 눕고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그 풍경 속에서 사람들은 평화롭고 행복하다.

갈대 숲 사이로 난 나무 데크 길
갈대 숲 사이로 난 나무 데크 길

종착지는 용산전망대다. 용이 순천을 향하고 있다고 해서 용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산이다. 해발 77m의 낮은 산이지만 일몰 무렵 이곳에서 바라보는 순천만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S자형 갯골이 바다로 흐르고 연못 위 연잎처럼 갈대군락이 갯벌 위에서 넘실거린다. 그 위로 붉은 노을빛이 내려앉으면 그렇게 은은하고 고요할 수가 없다. 40~50분을 걷고 산도 올라야 하지만 해가 질 무렵이 되면 다들 용산전망대로 향하는 이유다.

 

*기자가 체험한 우수여행상품
참좋은여행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처럼 여수/순천 3일]

 

순천 글ㆍ사진=김선주 기자 

저작권자 © 여행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