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은 북한과 중국의 국경이 만나는 한반도 최고봉의 산이다. 북한의 함경남북도(현 양
강도) 삼지연군(三池淵郡)과 중국 만주(滿洲)의 길림성(吉林省)이 접하는 곳에 있다. 해발고
도 2744m. 총면적 약 8000㎞. 산 정상부가 백색의 부석으로 이루어져 백두산이라고 불리는
이 영산은 사람이 함부로 다가가지 못했던 성역이었다. 일년의 반 이상 눈이 내리는 기후와
험준한 산세가 처음 장벽이요 민족의 발생지로서 신성함이 두 번째 장벽이다.

시간마저 정지된 태고의 신비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을 밟으며 천지를 향했다. 밤새 기차를 타고 달려온 피로는 이미
저 아래 백두산 온천물에 풀어 버렸으니 이제 남은 것은 천지를 향한 힘찬 발걸음이다. 근
데 웬지 백두산은 이 발걸음이 탐탁치 않은 모양이다. 겨우내 쌓인 눈으로 잔뜩 무장한 채
올 테면 와 보라고 배짱이다.
앞사람 발자국을 따라 똑같은 발 도장을 찍으며 일렬로 줄지어 간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보자는 가이드의 말에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면서 비장하게 발을 옮겼지만 싱겁게도 우리는
채 몇백 미터도 가지 못했다.
위쪽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눈이 깊어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었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다.
그래도 가자. 한 번 가보자. 가봤자 소용 없다지만 못내 아쉬워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
앞을 바라보니 천지는커녕 언덕만 굽이치며 계속되고 있었다. 눈앞을 가리는 거대한 산을
가리키며 가이드 아저씨가 하는 말. “저런 산을 4개정도 넘어가야 합니다. 걸어서 4시간이
상 걸리지요.”
못 볼 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듣고 왔다. 이제 막 5월이 되었으니 백두산은 아직
겨울. 눈이 녹기 시작하는 5월말이면 차가 운행하고 그 때에는 천지까지 30분이면 충분하단
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 어림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고집을 부렸던 것은 그토록 간절했기 때문
이다.
민족의 영산이여. 너 한번 보자고. 산이 자꾸 등을 떠밀어내는 게 자못 불쾌한데 아예 못을
박듯이 눈까지 내렸다.
천지를 보고 싶은 욕망에 불을 지른 것은 드물게 화창했던 날씨때문이기도 했고 좀 전에 천
지 폭포에서 본 경치가 기대 이상의 장관이었기 때문이다.
천지폭포(중국명칭은 장백폭포)는 천지에서 흘러나온 물이 68m 절벽으로 떨어지는 곳이다.
원래는 폭포 옆의 계단을 이용해 천지에 다다를 수 있다고 하나 우리는 폭포마저 먼발치에
서 볼 수밖에 없었다. 단단히 무장한 탓도 있지만 매서운 바람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온
몸은 감각을 한 곳에 집중했다.
언제 또 오랴. 이 장관을 파노라마처럼 엮어서 담아가려고 열심히도 둘러보았다.
천지는 해발 2500m가 훨씬 넘는 백운봉, 대정봉, 장군봉 등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 곳으로
올라가는 길은 단 2가지 밖에 없다. 우리는 그 두 코스를 다 시도했지만 오를 수 없었던 것
이다.
그래 그렇게 고귀하게 굴테면 굴어라. 다만 이것만은 부탁하자. 지켜다오. 너는 우리의 영산.
민족의 삶을 같이 하듯 지금은 너마저 두 나라로 갈라져 있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너의 물
처럼, 쏟아져도 쏟아져도 마르는 법 없는 정기를 내려다오. 그래서 통일이 되는 날 다시 만
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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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천소현기자joojoo@traveltimes.co.kr

민족과 운명을 함께하는 백두산
백두산은 민족의 발상지로 단군신화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다. 300∼400년 주기로 용암을 뿜
어냈던 휴화산이었기 때문에 사람이 살지 못했고 자연스레 불을 뿜어대는 성역으로 간주되
었을 거라는 짐작이다.
그러나 이 산의 성스러움은 산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본격적인 관광시즌에
돌입해도 실제로 천지를 볼 수 있는 것은 열에 한 팀 정도. 산의 정상부는 거의 눈으로 덮
여 있고 천지는 짙은 안개에 싸여 그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단다. 스스로 인간이 접근하
기 어려운 성지임을 선언하듯이 말이다.
역사적으로 백두산은 단군조선 개국의 터전이었으며 발해(渤海)가 멸망하기 전까지 부여(夫
餘), 고구려의 영토로 한민족의 정기를 다스려 왔다. 후에 요(遼)를 건국한 거란이나 금을
건국한 여진족의 발상지도 이곳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청(淸)나라 때에는 이곳을 장백산신
(長白山神)에 봉하고 출입과 거주를 제한하는 금봉책(禁封策)을 실시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세종(世宗)은 북방야인의 침범을 막기 위해 1434년(세종 16) 두만강 일대에 6진
을 설치하였고, 43년에는 압록강변에 4군을 설치함으로써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과 두만
강이 천연적인 국경이 되었으나, 백두산 일대는 너무 광활하여 국경선을 확연히 할 수 없었
다.
1712년(숙종 38) 5월에는 국경을 확실히 하자는 청의 제의에 의해 백두산의 분수령인 높이
2150m의 지점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이 비가 백두산에 전하는 금석문으로서는 최초의
유적이며 비문에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다…(西爲鴨綠 東爲土門…)>라고 새
겼다. 그 후 1880년(고종 17)부터 청나라는 돌연 토문이 두만(豆滿)을 뜻함이라는 억설을 주
장하더니, 1909년(순종 3) 만주 침략의 야욕을 가진 일본이 북경에서 청나라와 회담하고 토
문강에서 훨씬 남하하여 두만강이 한·청 두 나라의 국경이라고 임의로 협정을 체결함으로
써, 한국의 영토이던 간도(間島) 전역을 청나라에 넘겨주었다.
현재는 백두산 천지 수면을 경계로 하여 동쪽의 비류봉에서 남서쪽 마천우(麻天隅)를 향해
일직선으로 국경선 표시를 분명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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