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취재]연변조선족 자치주로의 여행
[현지취재]연변조선족 자치주로의 여행
  • 천소현
  • 승인 2000.06.0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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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가게에서도 천원짜리 한국 돈이 통용되는 곳. 집 바깥벽은 꼭 흰색으로 칠하고 굳이
논농사를 고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거리에서 대충 잡은 택시의 운전사가 우리말로 어디
가냐고 묻는 곳. 두만강 북쪽의 연변과 백두산 서쪽의 압록강 하류 지역에 걸쳐 있는 드넓
은 간도 땅. 200만 조선족 동포들이 살아 숨쉬는 중국 속의 한국이다.

독립투사 영혼이 머무르는 곳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의 동북부 길림성에 위치해 있다. 동쪽으로는 러시아, 남쪽으로는
북한 함경북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곳. 전체 인구 215만명 중에서 조선족이 차지하는 비
율은 약 40%정도다.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이 200만여명인 것에 비하면 85만명이라는 숫
자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전에는 더 많았었다. 80년대 후반에 중국이 추진한 적극적인 한족
이동정책으로 많이 줄어든 까닭이다.
그러나 아직은 자치주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한글 사용을 법령화할 만큼, 조선족끼리 결혼
하지 않는 것을 수치로 알 만큼, 조선족의 사회적 위치나 결속력은 강하고 뜨겁다. 어딜 가
도 교육열 높은 민족답게 이 지역 최고의 교육기관인 연변대학에는 조선족의 비율이 과반수
를 넘는다.
사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전체 중국에서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닐지 모른다. 조선족은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의 하나일 뿐이고 연변은 23개 성 중의 하나인 길림성이라는곳의 4분의 1
밖에 안 되는 작은 땅이다. 그러나 한국과 비교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연변은 남한의 약 절
반정도의 면적이며 행정구역으로 연길, 훈춘, 도문, 용정, 화룡, 돈화의 6개시와 안도, 왕청의
2현을 두고 있다.

연변의 중심 ‘연길(延吉)’
연변의 주소재지인 연길은 조금 지저분한 거리와 간자가 가득한 간판만 빼면 한국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전주 설렁탕집은 분점까지 있고 시내 한 복판엔 광주사우나가 있다. 한
국에서도 못 본 대형 노래방이 있고 외곽으로 빠지면 가든식의 식당도 많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연변에는 세 가지가 많다고 한다. 술, 노래방, 택시다.
한국의 경제적인 발전이 조선족에게는 더 없이 다행이라지만 한 조선족 여인은 ‘나쁜 건
한국에서 다 배워온다’며 혀를 차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 깊은 밤 거리를 배회하는 젊은 여자들과 한국에 가서 떼돈을 벌고 싶어하는 젊
은 남자들은 이미 사회적인 문제가 된 것 같았다. 조금 씁쓸한 마음, 안타까운 마음.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간다는 그들, 그래서 생기는 약간의 안도감.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 ‘도문(圖們)’
연길의 오른편에 위치한 도문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남양을 바라보는 한중국경선
이 맞닿은 곳이다.
이 곳 사람들은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강 건너편 북한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었다. 망
원경으로 북한땅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함북 46-863’이라는 번호판을 단 버스 한 대가 다
리위를 달렸다. 안에는 돌아가는 북한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도문을 찾는 한국인들은 이 국경선 앞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지만 꼭 가보아야 할 곳이 한
군데 더 있다. 1920년 홍범도(洪範圖)가 지휘하는 독립군이 일본군 1개 대대를 유인하여 기
습작전으로 600여명의 사상자를 낸 봉오동전투의 전적지다.
지금은 기념비와 소나무 한 그루가 서로 의지한 채 적적하지만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의
쾌거는 당시 국내외 국민들에게 감격과 애국심을 일깨워준 계기였다.

조선족의 수도 ‘용정(龍井)’
연변 대부분의 지역에는 조선족보다 만주족이 차지하는 비율이 많지만 96%가 조선족인 용
정은 특별히 ‘조선족의 수도’라고 불린다.
또한 이곳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이자 가슴 절절한 가곡 ‘일송정’의 탄생
지이기도 하다.
원래 일송정은 독립투사들이 오가며 쉬던 곳을 일컫는 말로 정자모양의 소나무에서 유래했
다. 그리고 그 옆을 흐르는 은띠같은 한줄기 강이 해란강이다. 이 곡을 작곡한 조두남은 당
시 망명청년이었으며 불과 21세였던 1933년에 윤해영의 시에 곡을 붙였다고 한다.
용정시에 위치한 대성중학교는 민족의 저항시인인 윤동주의 모교로 독립투사들을 양성하는
‘용광로’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한 학교다.
만주땅으로 찾아 온 독립투사들은 1910년대까지 항일독립운동을 준비하면서 사립학교 설립
과 항일단체 조직, 이주민들의 민족의식과 항일사상 무장에 주력했었다.
연변 조선족자치주=천소현 기자 joojoo@traveltimes.co.kr

조선족 이주의 역사 그들은 왜 간도로 갔나
간도땅에 이주한 조선족의 역사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중국 청나라 시대의 연변지역은 드문드문 만주족이 살던 개발 불가의 지역이었다. 이
지역이 청(淸)나라의 발상지에 가깝다는 이유로 청나라 왕조에 의해 봉금(封禁)의 땅, 즉 이
주를 금하는 무인지대로 정해졌기 때문에 간도(間島)라도 명칭 자체가 ‘조선과 청나라 사
이에 있는 섬과 같은 땅’이라 해서 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69년 함경북도 육진지역에 대흉년이 들자 조선인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간도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국경을 넘어 이주한 조선인들은 땅을 개간하고 집을 지으며 간도에 뿌
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청나라 정부는 1882년에 이르러서야 한인(韓人)의 개간을 공인해 주
었다. 그 때는 이미 많은 땅이 개간된 뒤였다. 이후 흉년 등의 이유로 북한땅에서 간도지방
으로 이주하는 조선인들이 종종 있었고 19세기 말에 대규모 이동이 한 번 더 있었다고 한
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루어진 이주의 향상은 사뭇 다른 것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을 이룬 일
제는 토지수탈정책을 폈고 이 때 농민들은 목숨같은 땅을 빼앗겼다.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
니라 내 나라, 내 조국의 땅을 빼앗겨 타국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체결, 1907년의 군대해산과 1910년의 한일합방. 잇따른 사건으로 국내
에서는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해진 수많은 애국지사들도 눈물을 머금고 만주를 찾아왔다.
이렇게 거듭된 조선인들의 이주로 36년에 이르자 연변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87만명을 넘어
섰다고 한다. 두고 온 가족과 동포들, 조국의 흙과 하늘. 금세 돌아가리라 하루하루를 지탱
해온 것이 45년 일제의 패망까지 장장 40년이 됐다.
이후 만주사변(1931)을 전후한 시기에 간도의 한국인은 일본의 침략주의와 중국 관헌의 대
항 사이에 끼어, 예를 들면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과 같은 복잡한 고난을 체험하기도 했으
며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수립되자 항일투쟁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해방이후에 간도의 주인은 중공군이 되었으며 1949년의 중공정부 수립 이후 몇년이 더 지난
52년에야 ‘연변조선족자치구’로 정해졌고 3년 뒤인 55년 ‘연변조선족자치주’로 승격하
여 조선족의 민족자치가 정식으로 인정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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