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 정원은 잘 깍은 목재 조각품처럼 극도의 인공미와 완성미를 자랑하고, 그런 축소지향인 일본의 정원과는 달리 중국의 정원은 웅장함과 크기로 인간을 압도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정원은 어떤 모습일까. 그 해답은 전남 담양의 소쇄원(사적 제304호)에 오롯이 담겨 있다.

곡선미·자연미 조화 극치 보여줘
소쇄원은 입구에서부터 여정에 지친 객의 마음을 감싸준다. 입구는 수 백년은 족히 서있었을 법한 울창한 대숲이 터널을 이뤄 사시사철 색다른 감흥을 선사한다.
가을 소슬바람이 불라치면 대 이파리들은 서로의 몸을 부산하게 비벼대며 재잘거린다. 대숲 터널의 천장엔 가을날 맑은 햇살이 수평선에서처럼 싱그럽게 반짝인다. S자로 굽은 대숲 터널을 완보하다 보면 굽었되 절대 지나치지 않은 한국적 곡선미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다.
흔히들 소쇄원을 가리켜 ‘인공과 자연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곳’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왠지 아쉬움이 남는다. 인공과 자연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데 그치지 않고 ‘인공이 자연 속에 스며들어 또 다른 자연’을 형성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자연을 이룬 소쇄원(瀟灑園)은 조선 중종 때의 소쇄공 양산보(1503∼1557)가 지은 별서(別墅 : 산수가 좋은 곳에 한적하게 꾸민 집)로, 양산보 당대뿐만 아니라 3대에 걸쳐 약 70년 동안 조성한 대규모 원림이다. 양산보는 55세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곳에서 처사(處士 : 벼슬이나 세상에 나서지 않고 초야에 묻혀 조용히 지내는 선비)로 지내면서 당대의 학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소쇄원은 약 1,400여 평의 규모에 대봉대, 제월당, 광풍각의 3개 누정만 남아있지만 기록에 의하면 원래 1만여 평의 부지에 12채의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어마어마한 규모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양산보는 어떤 목적으로 이 거대한 원림을 조성한 것일까. 문외한의 짧은 생각이긴 하지만 올곧은 선비의 기개를 더욱 다지고 드높이기 위해서였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소쇄원 조성 동기와 이곳을 드나들며 학문적 교류를 나눴던 인물들이 이를 증명한다.
양산보가 소쇄원을 짓고 평생 처사로 보내게 된 결정적 동기는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대표적 인물인 조광조의 죽음이다. 그의 나이 17세 때 스승 조광조가 신진사류들과 함께 개혁을 부르짖다 훈구파 대신들에 의해 능주로 귀양을 가게 되고, 끝내 그곳에서 사약을 받는 참극을 당하자 양산보는 벼슬의 허망함과 스승이 못다 이룬 개혁에 대한 아쉬움을 안고 산수에 묻혀 학문에 정진할 것을 결심, 소쇄원을 조성하게 된다.
이후 소쇄원은 당대 학자들 간의 학문적 교류의 장, 친목의 장, 토론의 장, 후학 양성의 장이 된다. 이곳을 드나들며 양산보와 교류하고 시를 남긴 인물로는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사촌 김윤제, 하서 김인후, 서하당 김성원,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이 있다. 지금도 소쇄원의 담벽에는 ‘瀟灑處士梁公之廬(소쇄처사양공지려)’라는 김인후의 글씨가 새겨진 나무판이 붙어있다. ‘廬(려)’가 ‘작은 오두막집’을 의미하므로 이는 ‘처사 소쇄공 양산보의 조촐한 오두막집’이라는 의미가 된다.
대숲이 만들어낸 야트막한 S자 터널을 벗어나면 곧바로 소쇄원의 전경을 한눈에 넣을 수 있다. ‘기운을 맑고 깨끗하게 한다’는 뜻을 지닌 ‘소쇄’라는 단어를 가슴으로 깨칠 수 있다. 서너개의 작은 폭포를 이루며 흐르는 계류 소리가 만들어내는 호젓한 분위기에 마치 얼근하게 취하기라도 한 듯 마음은 낙수의 리듬에 절로 빨려든다.
기록상으로는 총 12채의 정자가 존재했지만 현재는 3채 뿐. 제일 먼저 객을 반기는 것은 양산보가 손님을 맞이한 장소였던 대봉대(待鳳臺)다. 한 칸 짜리 작은 오두막이지만 ‘봉황을 기다리는 곳’이라는 뜻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찾아오는 이들을 정성스럽게 대한 주인의 마음이 46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전해온다. 상상 속의 상서로운 새인 봉황새는 벽오동 나무에만 내려앉는다는 믿음 때문이었는지 대봉대 앞에는 굵직한 벽오동 나무가 봉황을 기다리는 애틋한 모습으로 서있다.
대봉대에서 개울 건너 맞은 편을 바라보면 양산보가 기거했던 제월당(霽月堂)과 토론과 교류의 장소였던 광풍각(光風閣)이 울창한 수풀 사이에 다소곳하게 안겨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소리를 들으며 시문을 짓고 담소하며 책을 읽는 옛 선비들의 모습도 함께 아른거린다. 제월당과 광풍각의 명칭은 ‘흉회쇄락 여광풍제월(가슴에 품은 뜻은 맑고 맑음이 마치 비 갠 뒤 볕이 나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 같고 맑은 날의 달빛과 같다)’이라는 송나라의 글귀에서 따온 것으로 ‘광풍’은 맑은 날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을, ‘제월’은 비가 갠 뒤 떠오른 맑은 달을 일컫는다고 한다.
어른 키에 조금 못 미치는 높이의 담장을 죽 따라가면 개울 위에 놓인 작은 외나무다리가 나오는데 그 다리를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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