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 탐험가들의 전유물인 줄로만 알았다. 해발 4000여m에 이르는 알프스의 웅장한 봉우리를 코 앞에서 지켜보는 일. 그린델발트에서 출발한 산악열차는 클라이네샤이덱에서 한번 갈아타고는 거침없이 올라간다. 1시간 남짓 지났을까. 눈앞에 믿겨지지 않은 듯 유럽의 지붕들이 펼쳐졌다.

언제 눈보라가 치고 어두컴컴했었나 싶었다.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높았고 강렬한 햇살에 눈조차 뜨기가 싶지 않았다. 모두들 “다행과 행운”이라는 말로 아침 인사를 대신한다. 지난 밤새 걱정과 기대에 들떠 쉽게 깊은 잠에 빠지기는 힘들었다. 어제 저녁 유럽의 정상으로 향하는 기착점 중의 하나인 그린델발트(Grindelwald)에 도착할 때만해도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고 굵은 눈송이들이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 또 이 곳에 오를까? 어두컴컴한 하늘만 보고 돌아가야 하는 걸 아닐까’하는 걱정은 기우였을 뿐이었다.


자연과 인간이 빚은 순백의 장관
유럽의 정상은 스위스에서도 정중앙에 위치한다. 그린델발트 관광청 관계자는 농담처럼 “스위스 전도를 펼쳐놓고 십자 형태로 두 번 접어 가운데 접히는 점이 바로 이 지역”이라고 말한다. 최고봉 융프라우(Jungfrau·4,158m)를 비롯해 묀히(Monch·4,099m), 아이거(Eiger·3970m) 세 봉우리를 중심으로 빚어내는 알프스의 장관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자연이 빚어내는 경관 뿐만 아니라 자연을 보호하면서 그 자연을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도록 꾸민 인간의 무한한 힘은 더욱 놀라운 감동이다. 해발 3454m까지 기차가 올라가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를 오르며 만년설 아래 궁전을 만들었다. 스위스 기차여행의 백미는 사실 융프라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 스위스를 방문하는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이곳을 찾는다. 한국인들도 지난 한해 4만8,000여명이 방문했을 정도. 지난 6월까지 2만2,000여명의 한국인이 스위스를 방문했으니 70∼80%의 관광객들이 융프라우를 방문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 개의 봉우리는 재미있는 설화를 가지고 있다. ‘처녀’를 상징하는 융프라우, 이를 넘보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열혈남아 아이거를 사이에 두고 수도승인 묀히가 융프라우를 지킨다는 것이다. 최고봉이지만 유려한 선을 지니고 있는 융프라우와 직각의 암벽을 가지고 있어 이를 정복하고자 한 많은 전문 산악인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 아이거를 실제 보니 그럴 법한 이야기인 것 같다. 융프라우를 탐하지 못한 욕망이 애꿋게도 인간에게 미치는 모양이다. 지난해 한국인 산악인 2명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해발 3,454m까지 기차타고 오르다
종착점은 ‘유럽의 정상(Top of Europe)’이라고 불리는 융프라우요흐(3454m)다. 융프라우봉과 묀히봉 사이에 말 안장처럼 앉아 있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기차역이기도 하다. 익히 잘 알려진 대로 톱니로 기차가 이 꼭대기까지 끌여올려진다. 창밖으로 보여지는 풍경은 말그대로 ‘한폭의 그림’이다. 밤새 내린 눈이 오히려 축복이 될 정도로 세상은 온통 순수의 향연이었다. 그대로 사진 한 장 찍어 걸어놓으면 풍경화가 될 법하다.
그린델발트에서 중간 기착지인 클라이네 샤이덱을 거쳐 융프라우요흐까지는 약 2시간이 소요된다. 클라이네 샤이덱에서 잠깐 기념촬영을 하고 바로 융프라우요흐 행 기차로 갈아탄다. 그전까지는 일어서서 풍광들을 촬영하기 바빴다면 지금부터는 조용히 앉아 창밖을 감상하거나 잠깐 눈을 부칠 수 밖에 없다. 급격히 변화하는 고도에 따라 몸이 적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숨을 가볍게 내쉬고 몸도 천천히 움직인다. 두 번 전망대에 기차가 잠깐 서는데 유리창으로 된 전망대를 통해 알프스의 장관들을 내려다 볼 수 있다.

풍광에 감동하고 만년설에 뒹굴고
융프라우요흐에 도착하면 식사도 하고 휴식도 취하고 기념품도 살 수 있는 산정 휴게소로 연결된다. 거기서 다시 해발 3,571m 유럽 최고도에 위치한 관망대인 스핑크스까지 초고속 승강기 연결된다.
마치 하얀 눈이 강처럼 흐른다. 알프스에서 제일 길다고 하는 알레취 빙하(22km)다. 저마다 눈부심도 아랑곳없이 사진기 셔터를 누른다. 반대편에는 멀리 인터라켄까지 훤히 보이는 장쾌한 시야를 자랑한다. 저쪽 보이는 봉우리에 위치한 것이 쉴터호른 전망대다. 굳이 어느 봉우리, 어느 마을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지 않더라고 시원한 풍광 앞에서 할말을 잃는다.
융프라우요흐에서 또 다른 자랑거리는 얼음궁전. 약 1,000평방미터의 규모로 만년설을 동화의 나라로 바꾸었다. 전망대에서 본 알레취 빙하를 이용한 것이다. 아치형 지붕과 얼음으로 된 으리으리한 기둥, 푸른 불빛 아래 야생동물 등을 만들었다. 만년설이란 설명 하나만으로도 괜히 손길이 한번 더 간다.
융프라우요흐에서는 단순히 보는 관광만 즐기는 것이 아니다. 겨울에는 심한 기온 변화로 밖으로 나갈 수 없지만 비교적 안정적인 여름에는 직접 밖으로 나가 만년설을 발아래 느낀다. 스키도 탈 수 있고 썰매도 탈 수 있다. 눈썰매는 무료로 제공된다. 안전한 자일을 타고 빙하위 200m를 새처럼 날 수도 있다. 북극견이 끄는 썰매를 타고 빙하를 미끄러져 내려갈 수도 있다. 가이드와 이글루를 만들어 그곳에서 1박을 할 수도 있다. 인터넷으로 그림엽서도 보낸다. 휴게실에는 한국산 컵라면도 있어 기압과 여정에 시달린 입맛을 달랠수 있다.

인간의 무한 도전앞에 다시 감동
내려오는 길은 클레이네샤이덱에서 계곡 중앙으로 내려오는 라우터브루넨(Lauterbrunnen)행으로 택했다. 이쪽은 스위스인들이 직접 거주하는 아기자기한 마을을 지나치고 거대한 계곡과 폭포도 볼 수 있다. 날씨가 좋으면 융프라우를 가깝게 올려보며 하이킹하기에도 그만이다.
융프라우철도가 만들어진 것은 104년 전. 아돌프 구에르첼러라는 엔지니어는 클라이네샤이덱까지만 놓기로 돼 있었던 철도 공사 계획을 수정해 융프라우요흐까지 철도를 놓기로 했다. 아이거봉 아래의 바위를 뚫고 묀히봉 암반속을 통과하기로 했다. 1896년 첫 삽질을 시작했다. 당초 7년이었던 공사기간은 혹독한 자연조건과 붕괴사고, 공사비 조달 지연 등에 의해 16년으로 늘어났다. 1912년 8월1일 스위스 독립기념일에 개통식이 열렸다.
하지만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1970년대 불타버린 휴게소 대신 현재의 융프라우요흐를 건설했고 1996년엔 해발 3,571m에 최고의 관망대인 스핑크스 테라스를 건설했다. 스핑크스 테라스와 아래 휴게소를 연결하는 2개의 승강기는 108m의 거리를 단 25초만에 주파한다.
인간의 도전이 장엄한 자연앞에서 더욱 빛나는 순간이다.
융프라우요흐 글·사진=김남경 기자 nkkim@traveltimes.co.kr
취재협조=스위스 관광청 02-739-9511,
루프트한자독일항공 02-3420-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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