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시간과 요금 그리고 안락성은 항공업계의 3대 경쟁변수라고 할 수 있다. 비행시간은 항공기의 기종, 노선 그리고 직행여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같은 조건일 때는 우열을 가릴 수가 없어 요금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비행시간도 비슷하고 요금마저 비슷해지면 안락성, 즉 서비스가 중요 경쟁변수로 등장한다. 항공사 서비스의 꽃은 바로 객실서비스이다.
초기의 항공기에는 객실이란 것이 없었다. 1차대전후 퇴역한 낡은 군용기의 뒷좌석에 승객이나 우편물을 실었다. 캐노피도 없는 공간에 널빤지를 깔고 앞자리의 비행사와 꼭같이 안경이 달린 비행모를 쓰고 두툼한 외투에 털장갑을 끼고 긴 명주수건으로 코와 입을 감싸고 이륙하기전에 브랜디 한두잔으로 간담을 키운후 좌석벨트를 매고나면 앞에서 휘몰아 치는 프로펠라의 바람을 맞으며 시속 1백㎞도 못되는 속도로 이륙했지만 뜨는 순간에는 정신이 아찔하여 팬티를 적셨다. 비나 눈이 오거나 구름만 짙어도 결항이고 추우면 동태가 되었다. 뜨거운 물한모금 주지 않았지만 비행기를 탄다는 것만으로 호사스러웠다.
지금의 객실 같은 것이 처음 나타난 것은 30년대 후반에 비행정이 등장하면서 부터이다. 마틴 130차이나 틀리퍼(Mathin 130 China Clipper)같은 비행정은 4개의 거대한 프로펠라 엔진을 날개위에 장착하고 4명의 승무원과 32명의 승객을 태우고 시속 2백 62㎞로 바다위를 낮게 날았다. 밤에는 16명이 잠을 잘 수 있는 선반식 침대를 갖추고 있었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호자실이 없었다.
비행정 꽁무니에 앞은 가린 간이 화장실이 있었지만 밑은 훤히 뚫려 「열린 희열」이란 별명을 붙였다. 이 비행정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까지 22시간이 걸렸으나 그래도 느린 여객선에서 멀미를 하던 것에 비하면 새로운 경험이요 낭만과 호사로움이 여객선에 비할바가 못되었다. 그러나 비행정은 일기가 조금만 나빠도 맥을 못쓰며 고장이 잦아 2차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등장한 프로펠러 여객기의 초대걸작품이라 일컫는 DC3에게 밀려나면서부터 여객기의 객실은 새로운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객실에 남승무원이 탑승한 것은 1922년 영국에서 시작되었으나 배에서 선장방의 심부름꾼처럼 14살 정도의 어린 남자아이에게 짧은 상의와 달라붙는 바지를 입혀 객실에서 승객에세 비스켓이나 커피를 나누어주는 일을 시켰다. 최초로 스뉴워디스가 등장한 것은 1930년이었다. 유나이티드항공의 전신인 보잉, 에아, 트랜스폿이 시카고/샌프란시스코 구간에 승객들의 비행멀미를 해결하는 방편으로 간호원출신의 여승무원들을 탑승시켰으나 실제로 도시락과 커피서비스는 부조종사가 맡았다.
오늘날 보다 훨씬 힘들어 항공기 급유도 도와주고 비행기를 갈아탈 때 여객의 짐도 들어주고 객실바닥에 빗질을 했고 여객이 화장실을 갈때마다 길을 안내했다. 그냥두면 바깥으로 나가는 문과 구별을 못했다. 심지어는 의자가 바닥에 단단히 고정돼 있는지 볼트낫트를 점검하는가 하면 여객이 책을 읽겠다면 종이 깔데기로 전등불을 모아주는 일까지 했다.
객실에서 남승무원을 압도하게 된 것은 전쟁탓이었다. 군복무로 젊은 남자들이 자리를 비우자 여승무원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직종이 되었다. 영국항공의 기준으로 가장 이상적인 여승무원의 기준「갈색머리에 푸른 눈, 균형 잡힌 몸매에 날씬하고 키 1m60㎝ 체중 52㎏로 나이는 23세에 스포츠를 좋아하고 수영에 능하며 고졸학력에 직업훈련을 받았으며 매력적인 미혼녀」로 삼고 있다.
안락한 객실을 만들고 호화여객선의 일등선실과 같은 정찬서비스와 분위기를 흉내내기 위해 별의별 아이디어를 다 짜내었지만 온몸을 파고 드는 프로펠러 소리와 저고도에서 예고없이 비행기가 몇길이나 떨어졌다가 갑자기 솟구치는 에어포켓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오늘날과 같은 객실서비스가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2차대전이 끝난후 그것도 젯트여객기가 등장한 1958년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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