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과 함께 배천은 황해도의 최대 곡창지대로 고구려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통치자들의 주요 관심 대상지역이었다. 고려시대의 왕도였던 개성이나 조선시대의 왕도였던 한양의 외곽 방어거점으로 또는 관서지방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의 비중도 큰 지역이었다.

1914년에는 이 지역을 통합하여 연백군이라 했으나 북한 당국은 1952년에 연안군과 배천군으로 분군했고 다시 1957년에는 이 지역에 청 단군을 포함시켜 원래의 연백군은 3개 군으로 분군된 셈이다.

배천군의 동쪽에는 예성강이 흘러 개성시와 경계를 이루고 북쪽은 평천군, 서쪽은 연안군과 접해 있으며 남쪽은 긴 해안선과 간석지로 형성돼 있다. 지세가 완만하고 평탄하여 대부분의 면적이 2백m 이하의 낮은 지대를 형성하고 있어 산림지대는 빈약한 편이다. 따라서 주을온천지대처럼 자연의 빼어난 경관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읍 남쪽에 위치한 온천이 예로부터 유명했고 비교적 서울과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온천을 즐기는 사람들과 요양인들이 많이 찾아들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소설 「날개」로 유명한 모더니스트 이상이었다.

스물 세살이요-3월이요-객혈이다. 여섯달 잘 기른 수염을 하루 면도칼로 다듬어 코밑에 다만 나비만큼 남겨가지고 약 한제 지어들고 B라는 신개지 간적한 온천으로 갔다. 게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그러나 이내 아직 기를 펴지 못한 청춘이 약탕광을 붙들고 늘어져서는 날 살리라고 보채는 것은 어찌하는 수가 없다.

여관 한등 아래 밤이면 늘 억울했다. 사흘을 못 참고 기어 나는 여관 주인 영감을 앞장세워 밤에 장고소리 나는 집으로 찾아갔다. 게서 만난 것이 금홍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 「봉별기」에서 보이는 B는 물론 배천의 이니셜이다. 그리고 소설의 화자 「나」는 폐질환을 앓고 있던 이상 자신이었으며 죽음을 예견하고 있던 그가 청춘이 안타까워 찾아갔던 기생집에서 만났다는 금홍도 실재하던 인물이다. 금홍은 체구가 비록 풋고추만 했으나 제법 맛이 맵고 깡그라진 21세의 여자였다.

성격이 괴팍했던 이상은 프랑스 유학생인 만라는 청년과 금홍을 온천장에 특별히 설비된 「독탕」이란 곳에 함께 들어가 놀게 하기도 하고 자기 옆방에 있던 C라는 변호사에게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은 금홍을 무척 사랑했던 모양으로 서울로 데리고 와 종로에 「제비」라는 다방을 차리고 마담으로 앉히면서 동거를 하기도 했다.

현재 20여개 공에서 솟아나오고 있다는 이곳 온천은 유황성분만으로 되어 있고 광물질이 거의 없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수온은 섭씨 80도이며 고혈압, 만성관절염, 신경통, 수술 후유증, 부인병, 위염등의 치료에 이용된다고 한다. 그러나 배천은 본격적인 온천장으로 개발의 여지가 잇는지도 모른다.

배천은 시인 장만영의 출생지이기도 한데 오래 전 일이기는 하지만 1927년 그의 아버지가 논에서 김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온천을 발견하여 일제시 유명했던 배천 온천호텔의 주주가 되었다고 한다든지 이상이 1936년 위의 소설을 쓰면서 한적한 신개지라고 한 것을 보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온천공이 산재해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김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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