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봉우리 끼고 돌아 굽이치는 數百 폭포 그 물줄기는 박연이어라 개성에서 북쪽으로 40리 거리에 왼쪽으로 천마산, 오른쪽으로는 성거산이 우뚝 솟아 있다. 이 두산을 정상으로 하여 큰 원을 이루고 있는 산성을 천마산성 또는 대흥 산성이라 이른다.

일반적으로 박연폭포는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 북쪽으로 뻗은 계곡에 형성된 수많은 폭포를 통칭하는 것이지만 바로 박연이란 이름이 붙은 폭포는 진입로를 따라가자면 가장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다.

일찍이 조선시대의 기생 시인인 황진이가 일컫기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 있으니 성리학의 대가였던 서화담이 그 하나요, 황진이 자신이 다른 하나요, 박연폭포가 또 다른 하나라고 했다. 이것은 황진이가 자신의 유명함을 은근히 자랑하는 말이기도 하난 박연폭포의 절경 역시 유명했음을 알려주는 말이기도 하다.

박연폭포는 그 위치에 따라 상박연과 하박연으로 구분되는데 상박연에는 이체석불과 섬바위, 섬바위를 휘돌아 떨어지는 박연폭포가 있고 하박연에는 고모담과 많은 대소 폭포와 소( 沼 )가 있다. 고모담에 전해오는 다음의 전설은 박연의 유래를 잘 설명해준다.

옛날에 박씨 성을 가진 청년이 폭포 위로 자주 놀러 와서 피리를 불었다. 폭포 아래 沼속에 살고 있던 옹녀가 그 청년의 피리소리에 매혹된 나머지 청년을 유혹하여 물 속에 빠지게 했다. 자식의 죽음을 전해들은 청년의 어머니가 소에 와서 구슬프게 울었다 하여 후에 고모담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국문학자요 시조시인인 가람 이병기는 1933년 서화담을 추모한 뒤 박연폭포를 구경하면서 시조 한 수를 남겼다.

고개를 넘어넘어 험궃은 길을 걸어
고달프로 괴로움도 모르는지 잊었는지
폭포만 보노라 하여 비도 그저 맞아라
이골 물 저골 물을 건너고 또 건널 제
발 밑에 우는 폭포 백이요 천이더니
박연을 이르고 보니 하나밖에 없더라

남북왕래가 자유스러웠을 때 완행열차를 타더라도 서울에서 개성까지는 3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아침 5시에 서울을 출발한다면 개성에 도착하는 즉시 자남산에 올랐다가 정몽주의 생가터에 세워진 송양서원을 지나 선죽교를 보고 박연폭포를 가는 길목이 되는 산성리의 서사정터에 도착해도 11시 안짝이었다. 서사정은 서화담이 학문을 하며 휴식을 취하던 곳이라 하나 원래의 정자는 없어졌다.

여기서부터 골은 깊어지고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험준한 돌길을 지나며 고개를 넘고 아래로 치닫다가 다시 고개를 오르다 보면 천마산성의 남문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한층 더 깊이 미끄럽고 험하지만 좌우에는 높은 봉우리와 수풀이 우거져 있어 경관이 볼만하다.

다리를 건너면 대홍사가 있었다는 높다랗게 솟은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다시 좁고 깊고 으슥하고 컴컴한 계곡을 내려가면 무수한 작은 폭포를 볼 수 있고 그 마지막에 물 가운데 섬바위가 있는 지름 8m의 박연이 나타난다. 여기서 화강암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높이 35m의 박연폭포이며 그 아래 이루어진 소가 지름 40m의 고모담이다.

폭포 옆 바위에 누군가 새겼다고 하는
흩날려 떨어지기 삼천척(飛流直下三千斥)
은하가 구천에서 내려옴인가(疑是銀河落九天)
이백의 「여산 폭포」싯귀가 아직도 남아 있는지 궁금하다.

북한 당국은 박연폭포를 천연기념물(지리부문) 제388호로 지정하고 휴양각, 식당, 체육시설, 도서실 등을 갖춘「박연 휴양소」를 설치했다. 현재 개성부터 박연 구간까지 버스가 운행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김용성 인하대 교수. 소설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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