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수갑산의 개마고원보다도 더 높은 우리나라 최고의 고원이 무산고원이다. 북서쪽 경계에는 백두산이, 남쪽에는 연지봉, 간백산, 간삼봉, 복포태산, 백사봉등 2천 m를 넘나드는 연봉들이 줄지어 있으며 북쪽으로는 만주내륙과 연결된다. 또한 이 지역은 동으로는 두만강, 서로는 압록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특히 무산에는 두만강곡지라 불리는 깊은 골자기가 많다. 이 골자기들은 두만강 상류가 되는 여러 강들의 침식작용에 의해 생겨난 것들로 장관을 이룬다. 이곳은 바다바람의 여향을 받지 못하는 데다가 만주를 향하여 개방되어 있어서 겨울에는 북풍이 맵고 추위가 심히다. 그렇기 때문에 곡지이기는 하나 농작을 할 수가 없다.

김소월은 험준하기만 한 이 고산지대에 어떻게 왜 갔었던 것일까. 갑산을 지난 혜산진에 이르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백두산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는 왜 무산을 택했던 것일까. 그 물음에 대하여 대답할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렇다고 전혀 가상조차 해 볼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1924년, 소월은 바로 1년전에 동경대진재로 말미암아 일본에서의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고향인 평북 정주에 돌아와 있었다. 할 일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그는 조부의 광산산업을 도왔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때 갑산과 무산등지를 여행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주으린 새무리는 마른 나무의
해지는 가지에서 재갈이 든 때
온종일 흐르든 물 그도 인하여
놀지는 골자기에 목이 메든 때

그 누가 알았으야 한 쪽 구름도
걸려서 호독이는 외롭은 한을
숨차게 올라서는 여윈 길손이
달고 쓴 맛이라면 다 겪은 줄을.

그곳이 어듸드냐 남군이
말먹여 물끼었든 푸른 강물이
지금에 다시 흘러 뚝을 넘치는
천백리 두만강이 예서 백십리

무산의 큰 고객가 예가 아니냐
누구나 예로부터 의를 위하여
싸우다 못 이기면 몸을 숨겨서
한때의 못난이가 되는 법이라. <물마름 1-4연>

한 행이 7 5조로 되어 있는 이 시는 앞의 4연가지가 압록강과 두만강의 건주 여진을 징벌하였으나 유자광이 투항으로 죽음을 당한 남장군을 애도하고 있으며 여기에 인용하지 않은 5-8연은 그로부터 3백여년 뒤 한과 모욕에 견디다 못해 난을 일으켰으나 평북 정주성에서 패한 홍경래의 의를 우러러 읊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시는 무산에서의 감회가 동기가 되어 그의 고향인 정주에서 패한 홍경래와 연결되어 있다. 남이장군 휘하에서 국경을 지킨 병사들은 북방 사람들이지만 그 뒤 3백년이 넘도록 그 공이 무시당한 채 중앙으로부터 온갖 설움과 박해를 당해오다 참지 못해 난을 일으킨 홍경래의 대의를 말하면서 그 의를 달성하지 못했음을 물 위에 뜬 마름에 맺힘 이슬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북방 민중의 항거위식과 한이 담긴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소월이 찾았던 무산은 함경북도에서 가장 큰군이었으나 1950년 북한 당국은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연사군, 백암군, 대흥단군, 삼지연군으로 분군하고 뒤의 세 군은 양강도에 편입시켜 현재는 1읍 4개 노동자구와 16개리의 작은 군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백두산 일대의 관광자원도 삼지연군에 속하게 되어 열거할 만한 자원도 없다. 무산의 연평균 기온은 섭씨 5.6도, 8월의 평균 기온은 섭씨 21.9도에 불과하며 1월 평균기온은 섭씨 13.4도로 강추위를 나타낸다. 9월이 되면 첫 눈이 내리면서 겨울철에 접어들게 되면 이듬해 5월이나 돼야 얼음이 풀린다.

<김용성 인하대 교수, 소설가>
"
저작권자 © 여행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