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15 직후 최초로 한국인에 의해 '조선여행사'가 설립됐다. 조선여행사는 일본 동아교통공사의 경성지사(京城支社)에 근무하고 있던 한국인 직원들이 지사업무를 인수, 그 해 10월 1일 조선여행사란 명칭을 붙여 발족시킨 여행알선업체였다.
동아교통공사는 Japan Tourist Bureau(약칭 JTB)의 별칭으로 설립 초기엔 영문명칭만
을 사용했으나 그 후 일본여행협회, 동아여행사, 동아교통공사로 바뀐 별칭과 영문명칭을
같이 사용했다.
JTB 조선지부는 1915년부터 철도승차권 대매업을 취급하게 되면서 영업망을 확장, 서
울시내 도심지와 전국 주요도시에 안내소 또는 사무소를 두어 여행안내와 함께 철도승차
권을 판매했다.
JTB는 철도당국의 감독을 받고 있는 데다 철도여객 여행안내 및 승차권 판매업을 취
급하고 있는 여행업체와 철도의 상호협력을 필요로 하는 불가분의 관계로 더욱 긴밀한
협조가 이뤄졌다. 게다가 철도당국이 부대사업으로 철도호텔과 식당업(역 구내식당 및 열
차식당)을 운영하게 되면서 영업범위가 확대되면서 여행업과 호텔업이 철도와 밀접한 관
계를 갖고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한반도를 종단하는 철도(경부선, 경의선)는 압록강 철교를 지나 滿鐵(만주철도)과 시
베리아 철도를 연결, 항공여객 수송수단이 없었던 당시에는 유럽에 이르는 유일한 육로
교통로였다. 그 때문에 유럽과 미주 등지의 외국인 왕래도 잦았다. 철도를 이용해서 한국
을 찾거나 일본과 중국대륙을 목적지로 한 통과객이 크게 늘어난 것은 1937년을 전후한
때로 JTB 조선지부의 전성기도 이 무렵이었다. 외래객 안내업무뿐만 아니라 세계 주유관
광단도 모집해서 안내했다. 또 이 무렵에는 각종 선전간행물이 대거 발행되고 구미지역
외국인의 왕래가 잦았을 것으로 짐작케하는 영문안내서가 제작, 배포되었다.
1933년에 설립된 경성관광협회(京城觀光協會)도 점차 활기를 띠어 서울 일원의 관광
지를 소개하는 각종 선전책자를 발행하고 서울역에 안내소를 설치해서 여행안내를 했다.
이 당시에 발행된 선전간행물마다 게재된 JTB 조선지부 소개내용을 옮겨 보면 ""JTB
조선지부는 충분한 조사를 통해 단체여행 상담, 여행안내, 관광시찰 일정표를 작성해 주
고 있으며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또는 중국대륙까지 안내를 하고 있다. 철도승차권과 침
대권도 판매하고 있기 때문에 복잡한 역구내 매표구를 이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되어 있
다.
1940년에 들어 일본 군부중심의 세력이 등장하면서 호화스런 여행이 억제되고 각 역
에는 '불요불급(不要不急)의 여행을 삼가하고 국책수송(國策輸送)에 협력해 달라'는 포스
터가 나붙었다. 일본군은 이미 전쟁준비에 들어가, 태평양 연안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
다.
1941년 12월,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전시체제에 들어가면서
여행업은 시들해지고 여행객의 발길도 뜸해졌다.
이보다 앞서 JTB는 1934년 일본여행협회를 흡수해서 JTB라는 영문명칭과 함께 일본
여행협회란 별칭을 붙였다가 1941년 동아여행사로 개칭하고 사단법인을 재단법인체로 개
편했다. 그리고 1943년 말에 연합군에 밀려 패색이 짙어지면서 동아교통공사로 바꾸었다.
전시 중인데 한가롭게 여행을 즐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일제는 한반도의 주요자원과 산업시설뿐만 아니라 청·장
년을 강제징용, 군수공장과 탄광 등에 내몰면서 JTB 경성지사 직원들에게 징용자를 감
시·인솔하는 엉뚱한 일을 맡겼다. 강제로 끌려가는 사람들이라 도망자도 생겨나게 마련
이어서 이들 안내원들에게는 여간 큰 고역이 아니었으리라.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쟁이 종식되면서 동아교통공사는 일본교통공사로
명칭을 바꾸고 영문명칭의 Tourist를 Travel로 고쳐 Japan Travel Bureau라고 했다.
일본의 패망으로 동아교통공사 경성지사 재산과 업무 일체를 접수한 한국인 직원들은
그 해 9월 설립준비를 갖춰 10월 1일 '조선여행사'로 정식 발족했다. 사장에는 동아교통공
사 고문 閔瑗植씨가 추대됐다. 그리고 11월에는 영업소를 설치하고 운영했다.
""조선여행사가 개소되다.―조선여행사(전 동아교통공사)에서는 이번 한일백화점(전
삼중정)에다 11월 7일부터 개소한다는데 매일 오전 8시부터 시무한다. 특히 동사 업무과
에서는 매주 1회 덕정, 개성 등 38도선 경계지역에 사원을 파견하여 여행정보를 수집하고
일반 서북선 여행자의 문의에 응하리라 한다.""(<자유신문>, 1945. 11. 6)
이 밖에도 조선여행사 영업소는 서울 시내 주요지점에 증설됐다.
閔丙昱(재단법인 대한여행사 이사 역임, 현 성림산업 주식회사 대표이사)씨의 기억.
""조선여행사 설립 당시의 사무실은 동아교통공사 경성지사가 들어 있던 서울역 건너
편 2층 목조 건물로 지금 대우빌딩이 세워진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업소는 동아백
화점(신세계백화점, 일제 때 미쓰고시) 1층 남쪽에 설치하고 金玉謙(국제항공여행사 회장
역임)씨가 소장으로 있었으며 화신백화점에 종로 영업소를 두었지요. 조선여행사 본사도
그 후 사설철도회사인 경춘철도(京春鐵道) 본사 건물로 옮겼는데 지금 외환은행 본점 길
건너에 있었습니다. 46년 5월에 미군정청에서 사설철도를 國鐵로 흡수·일원화했던 것으
로 미루어 그 무렵에 이전된 것 같아요.""
을지로 본사에도 중앙영업소를 두어 철도승차권을 판매했는데 그 후의 일이지만 그
자리에 대원각이 세워졌다가 소실됐다.
조선여행사는 1946년 12월 주식회사로 개편되고 사장에 閔瑗植씨를 다시 선임했다.

""조선여행사가 정식으로 발족되다.
종래 운수부의 방계사업과 같은 운영을 하여 온 조선여행사에서는 세계적으로 조선을
소개하고 장차 외화획득에도 크게 이바지하려는 독자적 사명에 비추어 이번에 5백만 원
주식회사로 기구를 확대·강화하여 다음과 같은 새로운 진용(陣容)으로 정식발족을 보게
되었다.
▶ 취체역 사장 : 민원식
▶ 상무 취체역 : 정영욱, 배경희, 장서언, 김영욱
▶ 취체역 : 이태환, 이일준, 유재성
▶ 감사역 : 최용진"" (<서울신문>, 1946. 12. 17)

이 기사 중 '세계적으로 조선을 소개하고 장차 외화획득에도 이바지하려는 독자적 사
명'이라고 여행업의 중요성이 강조된 대목은 매우 감동적인 구절이다.
건국을 앞두고 여행업의 역할에 대해 그처럼 관심과 기대가 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이리라. 여행업에 대한 이같은 관심은 일제의 동아교통공사 활동을 지켜봤기 때문에 조선
여행사도 그같이 활약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조선여행사 설립 초기에는 철도승차권 판매업 위주의 운영이 불가피했다.
사회 혼란 탓도 있어 한가롭게 관광을 즐길 분위기도 아니었지만 관광에 대해 관심조
차 없었던 때여서 관광객을 모집, 안내하는 알선업무 등 여행업 운영에 제한을 받고 있었
기 때문이다.
미군정당국도 여행업 등 관광사업에 대해선 별다른 정책이 없이 우선 급한 것이 원활
한 철도 수송이었기 때문에 수송업무에만 치중했다. JTB(일본교통공사)가 종전 직후 美
주둔군을 대상으로 한 알선업무와 영어가이드가 안내하는 관광버스를 매일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등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운수성에 관광계를 신설, 이를 적극 지원하고 있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조선여행사도 자주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명승고적지를 답사하는 관광행사를 가졌다.
작은 규모의 단체라곤 하지만 수익성이 고려되어선 좀처럼 마련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봐
다분히 관광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여행사가 철도승차권만을 판매하는 곳이 아니
라는 인식을 심어 주는 데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같은 모집관광은 이를 신문
기사로 다룰 만큼 중요시되고 또 권장되고 있었다.
""조선여행사 주최 해인사(海印寺)계곡 탐승회―조선여행사에서는 13일부터 4일간 경
남 해인사 계곡 탐승회를 개최하기로 되어 있다. 회비는 2천 9백 원으로 정원은 20명, 신
청마감은 10일까지라고 한다.""(<동아일보>, 1947. 6. 4)
1948년 4월, 주식회사 조선여행사는 재단법인체로 개편되고, 정부수립 다음해인 1949
년 4월 대한여행사(大韓旅行社)로 명칭을 개칭했다. 대한여행사는 관광버스를 운행할 만
큼 사업규모가 확장되고 운영도 활발했다.
""관광버스 등장―대한여행사는 수도 서울 시내의 고적 명소를 소개하기 위하여 오는
8일부터 관광버스가 나온다. 즉 운행코스는 서울역-남대문-덕수궁-중앙청-국립박물관-종
로-파고다공원-창경원 등을 비롯하여 그 외에도 6-7개소를 탐방시킬 것이라 하며 관광비
는 1인당 6백 원이라 한다.""(<동아일보>, 1949. 7. 29)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여행업무는 일체 중단되고 말았다. 수난은 이
에 그치지 않고 사장 閔瑗植씨가 납북되는 불운을 맞게 된다.
우리나라 최초로 조선여행사를 설립하고 미군정 및 정부수립 직후의 조선호텔 지배인
을 역임하는 등 관광사업 발전을 위해 공로가 큰 閔瑗植씨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조
선여행사 설립 및 초창기 운영실태를 살피면서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는 것은 결코 무의미
한 것이 아니리라.
그의 장남 丙昱(전 재단법인 대한여행사 이사)씨가 들려주는 閔瑗植씨의 파란만장했
던 생애를 간추려 옮긴다.(경칭생략)
閔瑗植의 부친 閔泳喆은 구한말의 우국지사 閔忠正公(泳煥)과 6촌간으로 판서를 지냈
다. 그는 한반도를 강점한 일제가 회유책으로 나누어주었던 작위를 마다하고 가족을 데리
고 상해로 망명길을 떠났다. 1898년생인 閔瑗植의 나이 열두 살 때였다. 부친 閔씨는 개화
성향이 강했던지 아들 瑗植이 서구문물을 익히기를 바라던 터에 마침 上海에 나와 있던
불란서인 천주교 주교가 임기를 마치고 본국에 돌아가는 것을 알고 아들의 장래를 부탁한
다면서 서울을 떠날 때 가지고 간 패물을 유학비용으로 건네주었다. 주교를 따라 불란서
에 온 閔瑗植이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때였다. 1919년 1월에 '파리 평화 회의'가 열리기
직전인데, 이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상해임시정부 외무총장 金奎植 박사가 특사 자격으로
불란서에 와 閔瑗植을 찾았다. 閔瑗植의 형 裕植의 소개로 통역을 부탁할 참이었다 (裕植
은 구한 말 駐英 공사관 승지로 있다가 귀국, 瑗植과 함께 부친을 따라 상해에 와 그대로
머물고 있었다).
그때 閔瑗植은 한 지방의 작은 성(城)에서 주교와 같이 거처하고 있었는데 金박사는
먼저 주교를 만나 찾아온 뜻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주교는 한마디로 거절했
다. '학문에 열중하고 있는 학생을 정치 문제에 관여시킬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면서
부친 閔씨의 간곡한 부탁을 저버릴 수 없다며 더 이상 말도 붙이지 못하게 했다. 두 사람
의 얘기를 엿듣고 있던 閔瑗植의 생각은 달랐다. 한국에서 손님이 찾아왔다는 말을 전해
듣고 반가운 마음에 문 밖에서 두 사람이 주고받는 얘기를 듣고 있던 그는 金박사가 낙심
해 하면서 자리를 뜨자 몰래 성을 빠져 나와 金박사를 따라 나섰다. 나라가 없었으니 정식
대표도 아니었고 불어를 몰라 회의에 관한 정보도 얻을 수 없어 난감했던 金박사로는 천
군만마의 도움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는 기쁨이었다. 金박사를 따라 파리에 온 閔瑗植은
우편배달 아르바이트자리를 얻었다. 일본대사관이 있는 구역이었다. 그는 일본대사관에
오는 우편물은 모조리 호텔에 갖고 와 金박사와 같이 조심스럽게 하나씩 뜯어보고 풀칠을
해서 도로 집어넣는 일로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에는 기도를 드렸다. 金박사의 활동이 성
공되게 해 달라는 기원이었다. 閔瑗植이 파리대학 재학 중에 주교가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부터 친자식처럼 돌봐준 주교가 없는 불란서에 더 이상 남아있기가 싫었던지 그는 짐
을 꾸려 미국으로 건너가, 사촌형 閔熙植(미군정청 운수부장, 초대 교통부장관)이 다니고
있던 네바다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고국이 그리워서였을까. 네바다 대학을 거쳐 시카
고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던 그는 학업을 끝마치지 않은 채 돌연 고국으로 돌아와 연
희전문 불어과 교수로 취직했다. 그러나 마음이 편하지만은 못했다. 일제의 감시대상자
명단에 오른 그에게는 늘 고등계 형사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가 동아교통공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순전히 '불어'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태평양 전쟁 초기에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침공하는 등 남방 점령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문
화교류를 이유로 동남아 진출을 꾀하고 있던 동아교통공사는 인도차이나 지역 업무에 필
요한 불어를 하는 사람이 필요해 그를 경성지사 고문에 위촉했다.
1945년 광복을 맞으면서 그의 꿈은 마음껏 펼쳐지는 듯했다. 영자일간신문 <서울타임
즈(Seoul Times)>를 창간한 데 이어 동아교통공사 경성지사의 한국인 직원들과 함께 조선
여행사를 설립, 사장에 추대되고 미군 전용호텔인 조선호텔 지배인을 겸직하는 등 그의
활약은 참으로 컸다.
그는 1945년 9월 6일 미군선발대로 서울에 들어온 해리슨 美육군준장을 조선호텔에서
회견, 제 24군단이 9월 9일 인천에 상륙해서 서울에 진주한다는 소식을 호외로 발행했다.
그의 대학동창으로 극동지역에 파견된 미국의 한 특파원의 도움으로 미군신문<성조기
(Stars and Stripes)> 인쇄시설을 이용해서 신문을 제작하고 AP, INS(미국), AFP(불란서)
통신과의 계약을 체결, 활동범위를 넓혀갔다.
1948년 정부수립 직후 張澤相 초대 외무부장관 밑에서 잠시 차관보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불행히도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많은 아쉬
움을 남긴 채 그의 활약은 여기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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