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취재] 호치민이 창설한 유격대 ‘비엣민’
[현지취재] 호치민이 창설한 유격대 ‘비엣민’
  • 여행신문
  • 승인 2001.02.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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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이야기하는 ‘베트콩’은 월맹군을 낮춰 부르는 말로 ‘비엣민(Vietminh)’이 정식이다. ‘비엣민’의 역사는 1941년으로 올라간다. 호치민이 창설한 유격대에서 그 연원을 둔 ‘비엣민’은 일본과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항했고, 베트남전 당시 호치민 근교의 구찌터널을 기반으로 미군을 괴롭혔다.

유사이래로 인류는 전쟁이라는 공포 속에 살아왔으며 또한 우리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 순간에도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전쟁과 더불어 살고 있다. 혹자에 따르면 전쟁이 인류의 발전과 진보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인류의 역사와 행보를 같이 하는 전쟁은 곧 국가간의 경쟁을 통해 더 강력한 무기를 생산하기 위해 과학의 발전을 끊임없이 추구했고 사회에 응용되면서 삶의 질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또 전쟁은 사회의 진보를 이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쟁에 남자가 동원되면서 자연스럽게 남자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동원되던 여성들이 사회에 대한 역할을 유지했고 결과적으로 여자의 사회활동의 폭이 넓어지면서 여권(女權)이 신장되었다는 점 역시 전쟁이 인류의 진보에 영향을 미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류의 발전과 진보라는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더라도 전쟁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추악한 산물일 수밖에 없다. ‘전쟁이 벌어지는 현장에 이성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은 역시 노(NO)다.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약육강식에 따른 힘만이 존재할 뿐이다. 전쟁의 승리라는 목적을 위해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추악한 행위들이 자연스레 전개되는 것이 전쟁이다.

◆ 설득력 없는 미군의 참전

베트남전쟁 역시 단순히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한다는 미국의 명분 아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린 전쟁이다. 5만여명의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서야 최종적으로 손을 들었고 결국 북 베트남은 남 베트남을 함락하고 공산주의 강령에 의거해 베트남을 통일해 오늘날까지 이어오게 됐다. 현격한 장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이 미국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목적의식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베트남인들에게는 목숨을 건 생존 차원이었지만 미국에게는 단순히 공산주의 확산 저지라는 설득력 없는 목적만 있었을 뿐이다.

◆ 작은 지하세계 규모 놀라워

베트남인들의 저력은 구찌터널에서 볼 수 있다. 호치민에서 구찌 터널을 향하는 길은 우리의 시골길과 다름이 없다. 20대중반의 베트남 가이드는 여정 내내 미국을 물리치고 통일을 이뤄냈다는 자부심을 누누이 강조했다.

프랑스 식민통치시대인 1940년 무기를 감추거나 비밀통로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파기 시작했고 베트남전쟁이 일어나자 비엣민은 미국측의 강력한 화력에 맞서지 않고 이 터널을 보수하고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 터널은 총 연장 250km에 지하 7m 내외에 3층 구조로 되어 있어 미군의 파상적인 폭격에도 거뜬히 견뎌 낼 수 있었으며 산소를 얻기 위한 통풍구는 불에 잘 타지 않는 나뭇잎으로 위장하거나 지뢰를 설치해 보호했다.

특히 이 지역의 토양은 굳고 점성이 강한 흙으로 덮여 있어 땅굴을 파기에는 안성맞춤이었고 파낸 흙은 노인들이나 어린이들에 의해 땅에 얇게 뿌려지고 나뭇잎으로 덮거나 강물에 풀어 흔적을 없앴다. 굴의 크기는 대개 폭 50cm 높이 70cm로 체구가 상대적으로 컸던 미군들이 수색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또 특히 곳곳에 부비트랩을 설치해 수색중인 미군에게 치명타를 가하기도 했다.

두려움을 느낀 미군은 군견을 이용한 대대적인 수색과 함께 B-52로 하루에 80톤 가량의 폭탄을 무차별적으로 쏟아 부으면서도 효과를 못 보자 고엽제를 뿌려 생태계를 초토화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입구를 찾아보라는 가이드의 요청에 한참을 헤매다 결국은 포기했다.

입구는 30cm 자 길이 정도로 상당히 작았으나 그 밑에 펼쳐진 지하세계의 규모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간신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동굴안은 회의실, 부엌, 병원, 화장실, 지하수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당시 약이 부족해 부상당한 비엣민들에게는 간단한 처방만이 가능해 많은 부상자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식량 역시 턱없이 부족할 밖에 없었다.

비엣민의 주식은 고구마와 비슷한 ‘카사바’였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라 맛있다고 가이드에게 말을 건넸다 무안을 당했다. “당시 비엣민의 체구가 작았던 이유는 단순히 시장기만을 면하기 위해서 ‘카사바’를 먹었던 것이지 결코 맛이 있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특히 굴이 발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비엣민은 발자국 없이 걷기, 소리없이 이야기 하기, 연기 없이 요리하기, 보이지 않게 행동하기 등 생존을 위해 철칙을 지켜나갔다. 단순하게 관광객을 위한 짧은 터널이었지만 적막한 어둠 속에서 미군에게 항쟁한 비엣민들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 무엇을 얻은 전쟁인가

결과적으로 5만여명의 죽음이라는 결과만을 안고서야 미군은 최종적으로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된다. 확실한 통계는 아니지만 싸움의 터전이 되었던 베트남 역시 300만명에 가까운 인구가 줄어들었고 4백만명이 부상을 당했다.

케네디와 존슨 대통령 시절 국방장관을 역임함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는 자신이 저술한 ‘베트남의 비극과 교훈’이라는 책을 통해 ‘우리는 잘못됐다, 우리는 미래세대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야한다’라는 말로 미국의 베트남전쟁 참전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 본연에 내재되어 있는 호전성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전쟁은 인류 역사가 다하는 날까지 우리 곁을 맴돌 수밖에 없다는 게 마음 아플 뿐이다.

호치민=김헌주 기자 hippo@trave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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