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모로 접두사 ‘첫’이 붙은 출장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설을 외국에서 맞은 것도 처음이었고, 수월찮은 출장 이력 중에 중국출장은 또 처음이었다. 에어차이나 비행기에 몸을 싫은 것 역시 처음에 해당하고 결정적으로, 외국여행 하면서 가방을 잃어버린 것도 처음이었다.

유독 처음이 아닌 것이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날씨. 지난해 11월 보스턴 출장 때부터 짓궂던 날씨는 해가 바뀌고 지역이 바뀌었는데도 요상한 심술을 부려, 이번 중국출장에서도 거의 매일 눈·비를 맞아야 했다. 모든 것이 살가운 설 명절인데 하늘도 참, 지독한 악취미다.

설 당일인 1월24일 수요일 밤 10시40분 김포국제공항을 출발한 에어차이나 CA144편이 자정에서 40여분 지난 시각에 전세기 탑승객을 줄줄이 토해낸 곳은 중국 남경(南京). 중국 5대 고도(古都) 가운데 하나이자 남경대학살로 유명한 바로 그 남경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앞서 간략한 배경설명이 있어야지 싶다. 어디든 다르랴만 중국만큼, 그 넓디넓은 땅덩이만큼 역사의 폭과 깊이가 유장한 곳도 흔치 않을성 싶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평범한 진리도 그만큼 효과를 발휘할 터이다. 남경-소주-상해-무석으로 이어지는 이번 여정의 첫머리를 장식할 남경은 중국의 여러 성(省) 가운데서 강소성(江蘇省)의 성도이다.

중국 동부 양자강(揚子江) 하류를 중심으로 남북에 걸쳐 있는 강소성은 예전부터 농업이 발달, 쌀 생산량이 넉넉할 뿐만 아니라 해산물도 풍부해 중국에서도 가장 부유한 성 중의 하나로 꼽힌다. 지금은 상해를 중심으로 첨단기계설비와 중화학공업 등이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로 성장, 중국 공업의 대동맥을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다음 호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북한의 김일성 위원장이 방문해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소감을 피력한 ‘중국의 실리콘밸리’ 푸동(浦東)지구 역시 강소성 상해(上海)에 위치한다(상해는 행정상으로는 중앙정부의 직할시이기 때문에 실제 강소성 구역에서는 제외한다).

◆ 넉넉하고 풍성하고 또 붐비다

그렇다고 관광자원이 뒤질까? 답은 ‘전혀 아니올시다’다. 남경을 시발로 소주, 항주, 무석 등지의 볼만한 유적지들을 찾아 관광객들이 하도 모여드는 통에 그렇지 않아도 인구밀도가 높은 강소성 땅은 늘상 붐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춘절(春節·우리의 설에 해당)에 찾은 지역 명소들마다 관광객들이 꼬리에 꼬리를 이었는데, 이리 치이고 저리 밀치고 하는 게 때때로 사람 구경하러 이곳까지 흘러왔나 싶을 정도였다.

강소성 설명은 이쯤에서 갈무리하고 남경에 대한 것 한두 가지만 말하고 줄여보자. 남경을 흔히들 ‘육조의 고도’라 칭한다. 바로 동오(東吳), 동진(東晋)과 남북조시대의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고도가 남경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광활한 중국에서도 예닐곱 번째 도시로 치는 남경은 또 무한(無漢), 중경(中經)과 더불어 3대 혹서 지역으로 불리기도 한다.

겨울 추위라고 해야 가끔 영화 밑으로 떨어질 뿐 주로 영도 근처에서 기웃거리는데, 참 이상한 건 우리가 찾았을 때는 날씨가 꽤나 매서웠다. 영하 10도 밑을 간단히 파고 드는 서울의 혹한을 피해, 예까지 날라 왔는데 말이다.

◆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자, 남경에서 어디로 갈거나? 무엇을 볼거나? 다소 뻔하게 들리겠지만 역시 중산릉과 명효릉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중산릉(中山陵)은 중국의 국부(國父)로 칭송받는 손문(孫文)의 무덤이 있는 곳이고, 명효릉(明孝陵)은 명(明)나라 초대 황제인 홍무제 주원장(朱元璋)의 능묘다. 순간 남경대학살 자리에 건설됐다는 남경대학살기념관이 뇌리를 스친다.

그러고 보니 남경에서 가장 유명한 세 곳 모두가 죽은 이를 기리거나 죽은 이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장소 아닌가? 남경이 망자(亡者)들의 도시가 아닌가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갑자기 달려들었다 저만치 뛰어간다.

중산 손문 선생이 고이 잠들어 있는 중산릉으로 올라가는 연도에 심어져 있는 히말라야 소나무 위로 눈발이 제법 거세다. 우리를 안내하는 교포 3세 가이드의 입에서 서설(瑞雪)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늘 푸르른 소나무에 하얀 눈이라.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를 주창한 손문의 애국심과 청년정신이 소나무처럼 늘 푸르게 중국인의 마음속에 자리하라는 의미란다.

눈발을 뚫고 392계단을 오르는데 괜히 392개의 계단을 놓은 것이 아니라 이 또한 의미심장한 수치란다. 손문이 국민당을 창설할 당시 중국 인구가 어림잡아 3억9,200만명. 즉, 모든 중국인들이 동시대의 위대한 선각자를 기린다는 의미로 더도 덜도 아닌 392개의 계단을 이은 것이다. 가쁜 숨을 참고 392번째 계단을 밟고 서면 입구에 삼민주의 정신이 씌여진 제당이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입구 안쪽에는 흰 대리석으로 조각된 그의 좌상이 있고 묘실에는 손문의 와상이 안치되어 있으며 그 아래 관이 있다. 태평천국의 혁명적 전통을 이어받고 19세기 자연과학, 프랑스의 혁명사상 등이 포개진 그의 삼민주의 사상을 생각하고 짜부라진 조국의 정치판을 떠올리니 무딘 마음조차 흩부리는 눈처럼 어지럽고 어둑한 하늘마냥 먹먹하다.

◆ 주원장(朱元璋) 옆엔 오직 손권(孫權)만이

현재 남경에는 명나라 시절 황제의 능이 없다. 오직 명의 초대 황제인 주원장의 묘만 있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2대 황제인 영락제가 북경(北京)으로 천도(遷都)하면서 북경의 명 13릉을 옮긴 탓이다. 그나마 주원장의 묘 또한 묘실(墓室)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 모른다. 주위가 28리에 달하며 순장(殉葬)한 궁녀가 47명에 이른다는 가이드의 설명만이 귓속을 후빈다.

대신 능 주위에는 12마리의 동물을 상징하는 12지신상과 4명의 장군상, 4명의 승려상이 역사를 묵묵히 품고 있을 뿐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명효릉 부근에 오(吳)나라 손권(孫權)의 묘가 있는데 장군의 묘이기 때문에 주원장을 보호할 것으로 여겨 이장하지 않았다 한다.

황태자가 일찍 죽고 어린 손자가 황제위를 계승했으나 연왕(燕王), 즉 영락제가 쿠데타를 일으켜 남경정부가 멸망하는 등 말년이 외로웠고 사후까지 쓸쓸한 주원장의 유일한 말벗이 되어 주고 있는 셈이다.

◆ 인간의 포악함에 진저리를 치다

정확한 명칭이 대도살우난동포기념관인 남경학살기념관을 찾았다. 1937년 12월13일 남경을 침략한 일본군은 불과 6주동안 남경 시민 30만을 살해하는 그야말로 피의 대학살을 자행했는데 이는 당시 남경 인구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이 때의 일로 남경 사람들은 지금도 일본인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남경에 일본 자본의 유입이 어려운 것도 다 그런 연유에서지 싶다.

기념관 입구에 서있는 탑의 높이는 12.13m. 학살이 자행되기 시작한 날을 의미한다. 3개의 기둥과 0자 5개는 합쳐서 학살자수 30만을 나타낸다. 이 기념관이 있는 자리에서 발굴된 1만여명의 유골이 한구덩이에 넣어졌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일본군의 만행이 선연히 찍힌 각종 사진자료가 전시돼 있으며 유리벽 안에는 유골이 어지럽게 쌓여 있다.

어떤 건물벽에는 총탄자국이 조각돼 있다. 과연 인간의 광포함은 끝은 어딜까? 새삼 진저리가 쳐진다. 60년도 넘은 현장을 사진으로 보는 것만으로 이리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고 머리칼이 쭈뼛거리는데 당시의 실상은 어땠을까. 생지옥도 그런 생지옥이 없었을 것이다.

현재 남경에는 당시 대학살에서 천재일우로 비켜난 생존자 3명이 있다고 한다. 몇 해전 생존자 한 명이 사망하자 중국국영방송을 통해 전국에 공표할 정도로 이들은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다.

이들이 있었기에 일본의 씻을 수 없는 죄악상이 더욱 선연한 것이고 이들의 준엄한 고발이 있었기에 역사의 교정이 가능했던 때문이다. 기념관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비가 내린다. 어제 오늘 보는 비가 아닐 터인데 유난히 차갑고 또 시리다. 아직도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이 보태는 비는 아닐런지. 끝없이 착찹하다.

중국 남경 글·사진 = 노중훈 기자 win@traveltimes.co.kr
취재협조 = 차이나팩 항공 02-732-4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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