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여행사 직원 A양. 지난해 환절기 탓에 감기에 된통 걸린 적이 있다. 머리는 지끈지끈, 코는 맹맹, 기침은 콜록콜록…. 그날 아침 A양은 감기보다 더 지독한 일을 당했다. 기침하는 A양 모습을 본 B과장, “쯧쯧, 어젯밤 내가 더 꼭 껴안고 잤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더니 바로 감기에 걸렸네.” 그러면서 걱정해준답시고 이마에 손을 댄다. 불쾌하다.

지난 1월31일 노동부가 발표한 ‘2000년도 직장내 성희롱 사건 처리결과 분석’ 결과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노동부에 접수된 직장내 성희롱 신고건수는 36개 사업장에서 총 363건. 이는 직장내 성희롱 예방제도가 도입된 지난 99년 19개 사업장에서 19건의 신고가 접수된 것에 비해 무려 1,631% 증가한 수치다. 327건에 이르는 롯데호텔의 집단 신고건수를 제외하더라도 84% 증가했다.

노동부는 363건의 신고 중 17개 사업장에서의 84건이 직장내 성희롱 사건으로 밝혀졌으며 주로 의류 및 섬유업, 호텔숙박업, 금융보험업 등 여성이 다수 종사하는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또 피해자는 주로 20∼30대의 하위직급 여성이었으며 가해자는 주로 30∼50대의 상급자 남성인 것으로 분석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직장내 성희롱으로 밝혀진 17개 사업장 중 14개 사업장이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하지 않았으며, 11개 사업장은 노동조합이 조직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성 근로자의 비율이 타 업종에 비해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노동조합이 결성돼 있지 않고, 또 거의 모든 업체가 적극적인 직장내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하고 있지 않은 여행업계 현실을 감안할 때 이 같은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희롱 예방 및 신고 여건이 취약한 업계 현실상 드러나지 않은 채 물밑에서 자행되고 있는 직장내 성희롱 사건이 다수 존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같은 가능성은 지난해 롯데호텔의 경우만 보더라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노동조합 차원에서 직장내 성희롱 사건을 조사하자 그동안 물밑에 잠겨있던 사건들이 일거에 물위로 떠올라 총 327건의 신고가 접수된 것이다.

비록 327건 중 158건은 직장내 성희롱 예방 및 처벌 제도가 도입된 지난 99년 2월 이전에 발생했고 101건은 직장내 성희롱으로 성립되지 않아 68건만이 직장내 성희롱 사건으로 인정됐지만 이 사건이 직장내 성희롱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일깨우는 데 큰 몫을 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업계는 여전히 ‘성희롱 다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사업주는 물론 근로자들까지 직장내 성희롱과 관련해 소극적인 의식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법·제도적 장치도 제대로 뒷받침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녀고용평등법 제2조의2는 성적인 언어나 행동 등으로 또는 이를 조건으로 차용상의 불이익을 주거나 또는 성적 굴욕감을 유발하게 하여 차용환경을 악화시키는 것’을 ‘직장내 성희롱’으로 규정하고, 제8조의2에서 ‘사업주는 직장내 성희롱 예방 교육을 실시하고 직장내 성희롱을 한 자에 대해서는 부서전환이나 징계 또는 이에 준하는 조치를 취해야 하며, 피해근로자에게 고용상의 불이익한 조치를 하여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같은 법조항은 최근 직장내 성희롱 신고자 5명을 재계약에서 탈락시켜 분명한 ‘고용상의 불이익한 조치’를 취한 롯데호텔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성희롱 가해자나 이를 방지하지 못한 사업주에게 ‘위협’이 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모 항공사 카운터는 “외모나 몸매를 빗댄 언어희롱은 일상사”라며 “회식 자리 등에서는 술 취한 척하며 의도적으로 스킨쉽을 일으키는 경우가 무수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롯데호텔 사건을 계기로 팀별로 성희롱 관련 노동부 공문과 책자 등을 돌려보긴 했지만 이로 인해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도 덧붙였다.

어느 여행사 여직원은 “명백히 성희롱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어느 부서에 이를 신고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 뒷감당 할 엄두가 나지 않아 묻어버리곤 한다”고 털어놓았다. 직장 내에서의 이런 성희롱은 업계의 전반적인 분위기, 즉 개방적이고 잘 노는(?) 분위기 덕택에 큰 문제로 불거지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직장 밖으로까지 확대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거래처 접대 술자리에 이른바 ‘예쁘고 잘 빠진 여직원’이 불려나가 술시중을 드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여직원들 사이에서는 퇴근 무렵 걸려오는 전화는 절대 받지 말라는 묵계가 있을 정도라고 한다.

지방의 한 관광협회 여직원은 “지난해 실시한 팸투어 일정 중 저녁 술자리에 불려나가 새벽까지 춤추고 노래하고 술을 따랐다”며 팸투어 참가자들이 자신을 술집 종업원 취급하는 데 모멸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한 여직원의 “롯데호텔 성희롱 사례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언급이 현재 업계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잠잠하지만 힘이 모아지고 계기가 주어진다면 언제라도 ‘제2의 롯데호텔 사건’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달 29일 초대 여성부 장관으로 취임한 한명숙 장관이 취임사에서 밝힌 “성희롱 피해자가 불이익 없이 생활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하겠다”는 약속에 앞서 건전한 직장문화 형성을 위한 업계 종사자들의 의식전환이 더욱 절실하다.

김선주 기자 vagrant@traveltimes.co.kr
"
저작권자 © 여행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