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라 그런지 가족단위 관광객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40명이 넘는 우리 일행 가운데 혈육이 아닌 사람과 함께 왔거나 혼자인 사람은 불과 여섯이었다. 더 정확히 진정한 의미의 혈혈단신은 기자 혼자였다. 타향에서 수시로 또 불현듯 치밀어 오르는 ‘혼자란 이름’의 느꺼움!

세월을 가르는 寒山寺의 鐘鳴이여!
月落烏啼 霜滿天 월락오제 상만천
江楓漁火 對愁眠 강풍어화 대수면
姑蘇城外 寒山寺 고소성외 한산사
夜半鐘聲 到客船 야반종성 도객선

달은 지고 까마귀 우니 하늘엔 서리만 가득한데
강가의 단풍나무 고깃배의 불빛에 근심에 차 잠 못 이루네
오랜 소주성 밖 한산사
한밤 중 종소리가 나그네 뱃전까지 이르네

당(唐)나라 시인 장계(張繼)의 ‘풍교야박(楓橋夜泊)’이란 시다. 지금의 서안(西安)인 장안(長安)으로 과거시험을 보러갔다가 세 번째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장계는 그가 탄 배가 풍교와 강촌교(江村橋) 사이에 머물렀을 때 우연히 한산사(寒山寺)에서 퍼져나오는 종소리를 듣게 된다. 풍교야박은 종명(鐘鳴)과 마주친 장계가 자신의 낙담한 마음을 이곳의 경치에 빗대어 표현한 시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과거에 실패한 장부(丈夫)의 감상은 어떠했을까? 자신의 기재(機才)를 몰라주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 빈손으로 고향을 다시 찾아야 하는 민망함, 그동안 공들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허망함 등이 달마저 기운 한밤의 적막을 깨뜨린 종의 울음과 함께 까만 하늘 속으로 뭉게뭉게 피어올랐을 것이다. 이제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를 중동무이할 것인가에 대한 번민은 또 얼마나 컸을까? 그 헛헛함이여, 그 씁쓸함이여.

◆ 시 한 수가 전하는 애잔함

중국인들이 애송한다는 이 시는 소주(蘇州)에 있는 한산사(寒山寺)를 널리 알리는데 공헌했다. 한산사는 양(梁)나라 519년에 세워진 고찰. 처음엔 묘리보명탑원(妙利普明塔院)으로 불리던 것이 당대(唐代)의 저명한 고승 한산(寒山)이 기거한 후로 지금의 한산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운명도 기구한지라 그동안 다섯 차례나 화마(火魔)가 덥쳐, 거의 소실되었다가 청(淸)나라 말기인 1907년에나 모습을 복원했다. 아쉬운 것은 장계의 마음을 헤집었던 그 종은 청나라 때 일본인들이 약탈해 가져가다 배가 풍랑으로 침몰해 바다에 빠졌다고 전해온다는 점이다. 지금의 종은 사찰의 재건과 함께 1907년에 다시 만들어진 것으로 직경 1.4m에 높이가 2m이다.

어쨌든 시 한 수는 후세에 전해져 읽는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데 정작 시상을 불러온 소재가 없어진 셈이다. 묘하게도 우리나라 신라시대 감은사의 대종(大鐘) 역시 같은 이유로 유실됐다는 설이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고 약탈을 일삼은 일본인들이 얄궂을 뿐이다.

그네들도 미안했는지 한산사 대웅보전 안에는 일본이 사과의 뜻으로 보내온 종이 걸려있다. 허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고 허무맹랑한 눈가림이란 말인가?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기가 차고 콧방귀만 나올 노릇이다. 참고로 강촌교는 한산사의 입구에, 풍교는 한산사 오른쪽 100m 지점에 있는 철령관(鐵鈴關) 밖에 놓여있어 그 옛날 장계의 애잔함을 전하고 있다.

◆ 낭만과 서정은 세월에 씻겨가고

‘上有天堂 下有蘇杭(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 ‘정원의 도시’ ‘동방의 베니스’ ‘미인의 고장.’ 모두 소주를 일컫는 표현이다. 그만큼 소주는 예부터 정원이 많았고 하천이 풍부했으며 미인들로 붐볐다. 물과 여자가 많으니 시객(詩客)들이 앞다퉈 몰려들었던 것은 불문가지의 일. 당대의 많은 시인들이 소주의 거리와 서정과 낭만을, 찬양하고 노래하고 읊조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운치가 많이 퇴색한 편이다. 시내 구석구석까지 뻗쳤던 운하와 수로 중 몇 군데는 복개되었고 수로에 흐르는 물도 생활하수로 인해 적잖이 오염되었다. ‘동방의 베니스’란 칭송이 흐르는 역사 앞에서 자꾸만 허명(虛名)을 키우는 꼴이지 싶은데, 사실 ‘서방의 베니스’도 실제 가보면 그 정갈함과 감흥이 구전을 통해 다소 불어난 것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물이 풍부한 도시답게 소주는 정원문화가 발달했다. 전국시대부터 발달한 건축기술과 태호석이라는 정원의 장식에 안성맞춤인 재료와 대나무가 자랄 수 있는 자연환경 등도 정원문화 만개의 호재로 작용했다.

◆ 정치인의 무용(無用)은 예나 지금이나

덕분에 소주에는 북경(北京)의 이화원(梨和園), 승덕(承德)의 피서산장(避西山莊)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명원(名園)으로 꼽히는 정원이 두 개나 있다. 졸정원(拙政園)과 유원(留園). 그 중 졸정원이 소주 최대의 정원이다.

졸정원은 그 이름의 유래가 흥미로운데, 두 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하나는 서진(西晉)의 반악(潘岳)이 지었다는 ‘한거부(閑居賦)’의 다음 구절에서 따왔다는 설. ‘채소밭에 물을 주어 채소를 팔아 아침저녁 끼니를 마련하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 있는 것.

이것 또한 못난 사람이 다스리는 일일밖에(灌園蔬以供朝夕之膳…孝乎惟孝 友干兄弟 此亦拙者之爲政也).’ 명(明)의 어사(御史) 왕헌신(王獻臣)이 관직에서 추방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을 지은 후 소주에 칩거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잘 표현했다는 생각에서 뽑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 왕헌신이 정원을 개축한 후 안에 들어가 보니 마치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겨져 “차라리 정치를 하지말고 일찍 여기에서 지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 와서 생각하니 정치하는 사람들은 매우 쓸모가 없는(拙政) 사람들이구나”라는 생각에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는 설이다. 정치인의 무용(無用)함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름이 없는가 보다. 여하튼 면적이 50㎢에 달하는 대(大)정원의 명패에 ‘졸(拙)’자가 들어가니 그 어긋남의 작명에 소소한 웃음이 번진다.

◆ 기울어진 탑 아래에 서서

이 정원은 허허롭게 둘러보는 데만도 족히 몇 시간은 소진된다. 지도를 보아가며 구석구석 찬찬히 ‘읽는’데 걸리는 시간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뿐이다. 그래도 가장 권하고 싶은 건 지나치고 마주치고 돌아가고 질러가며 나타나는 연못들과 정자와 누각, 화수(花樹)들의 개개의 이름과 연원에 집착하지 말고 여유롭게 즐기고 쉬라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정자를 거론하라면 원향당(遠香堂)을 들 수 있는데 ‘은은한 연꽃향기가 멀리까지 퍼진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조망하는 졸정원의 풍경이 유달리 선연하다. 새겨둘 것은 정원을 제대로 보는 방법이 밖에서 안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는 점이다. 뜻밖에 소주 체류기가 길어졌는데 이 고장에서 한 곳 더 보고싶다면 북서쪽에 위치한 호구(虎丘)가 의당 다음이 될 터이다.

춘추전국시대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아버지 합려(闔閭)를 묻은 곳으로 호구란 이름은 장례를 지낸지 3일째 되던 날 백호(白虎) 한 마리가 나타나 능을 지켰다는 데서 유래한다. 합려가 천하의 명검을 시험해 보기 위해 시험삼아 잘랐다는 시검석(試劍石)과 1,000명이 앉아서 승려의 설법을 들었다는 천인석(千人石), 호구산 정산에 있는 47.5m의 운암사탑(雲岩寺塔) 등이 볼거리다.

특히 8각형에 7층으로 구성된 운암사탑은 북서쪽으로 약 15도 정도 기울어져 있어 피사의 사탑을 연상시킨다. 탑 건립시 기초가 다소 허약한데다 장구한 세월의 풍화와 침식이 겹쳤기 때문이다. 그래도 천년을 버텼으니 용하긴 한데, 또 천년 후엔 어떨지 모르겠다. 호사스런 궁금증이 도진 셈이다.

중국 소주 = 글·사진 노중훈 기자 win@trave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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