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북히 먼지를 뒤집어쓴 성서를 꺼내어 가방 한 구석에 챙겨 넣었다가 ‘짐만 될 텐데’싶어 빼버렸다가, 다시 마지막 순간에 가방 깊숙이 밀어 넣는 것으로, 이스라엘 출장 준비는 끝났다. 정말 가고 싶은 곳을 가는데 발걸음은 왜이리 무거운지. 조그마한 성서 한 권의 무게가 십자가처럼 어깨를 누른다.

〈글싣는 순서〉
1. 성서의 도시, 예루살렘에 입성하다
2. 예루살렘 올드 시티
­마음에 쌓는 성전
3. 예루살렘 뉴 시티
­세계의 중심, 예루살렘
4. 갈릴리와 티베리아스
­세상의 바닥, 갈릴리에 엎드려
5.출발 갈릴리!­골란고원을 넘어


◆ 성지…그곳도 삶의 터전

도착한 날은 이스라엘의 신임 총리를 선출하는 선거날(2월6일)이었다. 인상 좋게 생긴 가이드는 휴일이라 도로가 막히지 않을 거라는 말로 입을 열더니 순서에 따라 이스라엘에 대한 개요를 늘어놓고는 시내를 어지럽히고 있는 히브리어 선거 포스터와 현수막 내용까지 설명해 준다.

이미 뉴스를 통해 아리엘 샤론의 당선이 유력하다는 소식을 들은터라 관심은 때마침 겹친 환경미화원들의 파업으로 기울었다. 그래, 여기도 정치 세력간의 다툼이 횡행하고, 연례적인 임금 투쟁과 파업이 벌어지는 삶의 터전이지.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총알이 휙휙 날아다니지 않느냐고 묻는다. “아니요. 총을 맨 군인들이 많긴 하죠.

무스를 바르고, 선글라스를 낀”. 군인들이 부주의하게 매고 다니는 총들은 처음엔 두려웠다가 나중엔 거리에 쌓인 쓰레기만큼도 시선을 끌지 못한다. 오히려 두려운 것은 뭔가 종교에 대한 의미를 찾겠다고 성서를 십자가처럼 지고 와서도 마음을 열지 못하는 나 자신이다. 검은 모자와 긴 검정코드, 수염과 양옆으로 꼬아내린 머리가 인상적인 하씨딤들(극단적인 유대교인). 이방인들의 집요한 관심에 그들이 가질 수 있는 불편한 심정을 지레짐작하니 선뜻 다가가기가 어렵다.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등으로 이어지던 이민족 지배의 수난끝에 결국은 ‘디아스포라(분산: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히브리인들을 부르는 명칭)’의 운명으로 내몰렸던 고난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한국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느끼는 동질감은 그냥 생각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휙휙 날아다니는 총알이 있다해도, 사람의 닫힌 마음만은 뚫지 못하지 않겠는가.

◆ 3,000년 고도…아름다운 바위들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도착해 시작한 공식일정은 ‘이스라엘 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알아야 한다’는 것인지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인지, 12개의 전시실을 돌며 가이드가 설명하는 역사와 유적들에 대한 설명은 길고 지루했다. 굳이 박물관에 들어가지 않아도 지천으로 널려있는 ‘예루살렘 스톤’들은 저마다 목격해온 3000년 고도의 역사를 밤마다 이 언덕에서 저 골짜기로 전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은 서툰 걸음마 중인 신생국가 이스라엘에 마지막 심판이 오면, 유일한, 그리고 생생한 증인이 될 것도 이 바위들인 것 같다. 새벽이면 떠오르는 태양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나는 예루살렘의 올드 시티와 뉴 시티는 모두 이 석회석 건축물들로 채워져 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베이지색, 노란색, 황금색, 주황색, 살색, 갈색, 그 중간 어디쯤 되는 그 변화무쌍한 색이 이 도시의 색깔이다.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쌓여 있는 올드 시티의 모든 성지뿐 아니라 박물관을 포함한 주요 시설들은 인공적인 색깔 입히기가 허용되지 않았지만, 그런 규제가 없었다고 해도 하루에도 몇 번씩 표정을 바꾸는 이 천연의 빛깔보다 아름다운 색은 존재하지 않는다.

◆ 황금의 도시 예루살렘과의 만남

고대하던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들어왔다던 황금문이 아니라 그 반대편인 서쪽의 ‘자파 게이트(Jaffa Gate)’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국보1호나 보물1호가 남대문, 동대문인 것처럼 오스만 터어키 제국의 슐레이만 대제에 의해 완성된 예루살렘의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8개의 성문(욥바문, 세문, 다마섹문, 헤롯문, 스테판문, 황금문, 본문, 시온문)들은 하나 하나 특별한 용도와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중에서도 회교도들에 의해 마지막날의 심판이 시작되는 지점이라고 믿어지는 황금의 문은 2중으로 굳게 막혀진 채로, 그날이 오면 가장 빨리 살아나기를 원하는 회교도들의 무덤에 둘러싸여 있다. 짧은 예루살렘의 여정 동안 가 본 곳보다는 안 가본 곳이 많았고, 볼수록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성서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과 살벌하기만 한 TV속 화면으로는 현장에서 부딪히는 모던한 도시의 분위기와 평화로운 일상생활은 상상할 수도 없었으며, 동서로 15분, 남북으로 20분이면 된다는 옛성의 작은 땅덩어리가 기독교, 유대인, 아르메니안, 이슬람의 네 지역으로 엄격히 구분되어 서로 침범하지 않고 각자의 지역으로 난 문으로만 통행하며 산다는 사실은 나의 정치적, 사회적 감각에서는 자연스럽지 못했다. 이렇게 시작된 이스라엘 여행은 매 순간 ‘여기가 정말 이스라엘인가’라는 혼란스러움을 안고 마음속의 성지를 찾아 헤매는 시간으로 이어진다.

이스라엘 글·사진=천소현 기자 joojoo@traveltimes.co.kr
취재협조 이스라엘 관광청 02-733-1021
ELAL 이스라엘 항공 02-779-5710


◆ 소우주, 이스라엘의 민족과 종교
“이스라엘은 클럽 샌드위치입니다” 가이드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600만 인구중에서 유대인 500만, 팔레스타인과 기타민족 100만. 간단한 인구 구성비 같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분하는 것은 민족이 아니라 종교다. 유대교인 470만명, 이슬람교도 90만명, 기독교가 12만명.

현재 진행중인 이스라엘 국내 분쟁의 당사자는 유대교인과 이슬람교도들로 대별되지만 유대인들도 그 면면을 살펴보면 복잡하기 짝이 없다. 극단적인 전통 유대교인인 하씨딤, 민족 종교 유대인, 전통적 유대인, 유대 계율을 따르지 않는 유대인 등 유대인이라고 다 같은 유대인이 아니다.

이 밖에도 각각 자신들이 진짜 유대인이라고 주장하는 검은 히브리인과 사마리아인, 유대인이면서도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는 메시아닉 유대인들도 소수지만 엄연히 독자적인 전통을 지니고 있다. 시오니즘에 따라 가나안땅으로 회귀하긴 했지만 지난 삶의 터전에서 습득한 다양한 모습과 문화가 쉽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기독교인들도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안 교회, 시리아 정교회와 콥트 교회, 이디오피아 교회, 가톨릭, 영국교회, 몰몬교 등 다양한 종파들이 이스라엘에 들어온 순서대로 주요 성지에 적지 않은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이 몇 층짜리 클럽 샌드위치가 될지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클럽 샌드위치를 주문하는 어느 누구도 굳이 빵속의 재료를 들쳐가며 따지고 들지 않듯이, 어깨를 들썩하며 ‘여긴 이스라엘이잖아요’라고 말하는 이 나라 사람들에게 항상 테러의 위협속에 사는 일상의 삶은 두꺼운 클럽 샌드위치를 무심히 베어 무는 일과 차이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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