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에서 바라본, 있는 그대로의 밴쿠버의 친근한 바깥 경치는 아주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고 살아남아 있다. 모노레일하니 시애틀도 떠오른다. 시애틀 도심과 시애틀의 남산 타워 격인 스페이스 니들을 연결하며 운전자 없이 앞 뒤 양방향으로 달려가던 그 경전철의 승차경험이 쾌적함과 신기함으로 남아있다. 북미지역이 이런 하이테크 교통수단으로 대변된다면 유럽은 마차가 지나다니는 고풍스런 길로 다가온다. 스위스의 인터라켄이나 브란덴 빌트의 깨끗하고 아담한 거리를 지나다니던 우람한 네 마리의 말이 끌던 마차들.
짤즈부르그의 성당 앞에서 나란히 옆으로 줄서 관광객들을 기다리던 마차 마부들의 무표정한 얼굴도 떠오른다. 한 겨울에 찾아간 오스트리아의 제펠트. 그 동화 속 마을 같은 휴양도시 주변 숲 속 길을 마차를 타고 달려보았다. 때마침 함박눈이 내렸다. 그때의 눈 내리던 숲의 풍경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는다. “말은 마구에 달린 방울을 한번 흔든다. 그 외에 나는 것은 느슨한 바람 따라 눈송이 쓸리는 소리…” 프로스트의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라는 시를 떠올리게 했던 숲길과 눈과 마차였었다.
파리하면 베르사이유 궁의 숲, 그 녹음 짙은 나뭇길을 따라 자전거를 탔던 낭만적인 추억이 떠오른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여행이 아닌가 싶은 기억을 주는, 주변 분위기와 행동이 자연스레 연출되는 곳이 관광으로 잘 나가는 도시나 나라들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큰 섬에서 다시 작은 섬으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인도네시아의 아주 작은 섬도 기억난다. 그 섬에서 엔진으로 회전되는 바퀴가 달린 자동차 종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말이 끄는 마차가 섬의 택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동남아시아의 경우, 말이 끄는 마차라는 점은 같으나 유럽과는 이미 다른 분위기다. 말도 다르고 마부도 다르다. 왜소한 체격에 검게 탄 마부. 달리는 도중, 말의 분뇨 배설을 해결하기 위해 말 엉덩이 부분에 걸쳐놓은 분뇨 통. 그래도 모두 인간적으로만 느껴지는 삶의 한 부분이다.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와 같이 동남아시아 쪽에는 대부분 뚝뚝이라고 불리는 간이 택시들이 차선도 분명하지 않은 시내 길을 마차와 함께 돌아다닌다.
런던은 걸어 들어갈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의 블랙 캡 택시와 빨간 색의 런던버스가 도시의 상징처럼 도시의 구석구석을 다닌다. 그렇다면 한국이나 서울의 경험을 색다르게 만들 수 있는 우리 고유의 교통편은 과연 무엇인가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교통수단도 관광상품이 될 수 있다는 적극적인 마인드가 필요한 것이다.
경희대 관광학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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