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南京)과 소주(蘇州)를 돌아 도착한 상해는 여러 가지로 상반된 느낌을 풍겼다. 고풍스런 건물들이 가득한 외탄(外灘)거리는 휘황한 불빛에 싸여 유럽의 어디쯤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 반면 우리네 독립운동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홍구공원과 임시정부청사는 서글플 정도로 초라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 번 밝혀 두어야겠다. 상해가 행정구역상 강소성에 속한 도시가 아니란 점을 말이다. 강소성과 절강성(浙江省)을 경계로 하고 있는 중국 정부의 직할시가 바로 상해다. 오늘날 상해는 그야말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눈부심의 씨앗이 아주 오래 전에 뿌려진 것은 아니다.

조그만 어촌에 자족하던 상해가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변모를 일신하게 된 계기는 바로 영국과 1842년 8월에 체결한 난징조약.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에 정치, 경제, 문화, 영토 침략의 길을 터준 불평등조약이 오늘날 상해를 경제적 거대도시로 탈바꿈시켰다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독립운동의 聖殿을 찾다

상해시의 경제적 용틀임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접고 우리네 독립운동사의 소중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임시정부청사와 홍구공원으로 발길을 돌리자.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선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준비됐다.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해 대한민국의회정부(러시아령), 천도교 중심의 대한민간정부(서울), 조선민국임시정부(서울), 신한민국임시정부(평안도), 한성임시정부(서울·인천), 고려임시공화국(만주일대) 등.

이 중 헌법과 의회, 정강, 강령 등을 갖춘 실질적인 정부인 상해, 러시아령, 서울의 임시정부가 상해에 집결해 1919년 9월15일 통합임시정부를 구성하고 45년까지 각종 광복정책을 수행했던 것이다. 상해 마영로(馬營路)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가 있던 1932년까지 사용된 곳이다.

3층 구조의 청사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책상, 침대, 태극기, 임정 요인들의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그리고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전·현직 대통령을 비롯한 중요 방문객들의 사진과 서명도 걸려있다. 익히 들어왔던 터라 청사의 초라함에 한숨이 배어 나올 정도로 실망하진 않았지만 조국 광복을 위해 온몸을 바친 의사들의 노고와 기개를 감안하면 착잡한 마음의 일단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93년 4월에 복원된 이 청사는 사실 당초 아파트 신축계획에 들어 있어 자칫 형태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될 뻔하던 것을 한국측의 노력으로 구제됐다고 한다. 나머지는 말하기도 민망한데, 임정 수립 직후인 1919년 5월에 입주했던 상해 회해중로(淮海中路)의 청사는 이미 헐려버렸고, 다른 청사들과 인성학원 등 독립운동 관련 건물 10여채도 복원이 불가할만큼 변형됐다.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에 대한 푸대접이 이만저만이 아닌 셈이다. 청사와 청사가 위치한 주변 환경의 영락함도 그렇지만 관람객들의 심드렁한 표정도, 청사 내 기념품 판매 점원의 무심한 태도도 세월의 더께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이제 그 어디에서도 당시의 절박함과 치열함, 정명한 정신을 느낄 수는 없다. 그저 껍데기만, 외형만, 징표만이 남았을 뿐.

◆ 超人을 그리며

32년 5월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나 절강성의 항주(杭州)로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이봉창(李奉昌)과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의거로 일본의 탄압이 점점 옥죄어 왔기 때문. 37년에는 또 다시 중경(重慶)으로 이동하는 등 객지에서의 고단한 독립운동은 45년 8월 광복을 맞을 때까지 계속됐다.

윤 의사가 그 유명한 도시락 폭탄을 던진 홍구공원은 현재 노신공원(魯迅公園)으로 그 이름이 바뀌어 있다. 노신의 묘와 좌상, 기념관 그리고 마오쩌둥이 썼다는 묘비가 있으며 윤 의사의 쾌거를 기념하는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아침에 찾은 탓인지 여기저기서 체조와 배드민턴을 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저들은 과연 이곳에서 조국 광복의 희망을 품고 일본군 수뇌들에게 폭탄을 투척한 윤봉길이란 존재를 알고 있을까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1930년 3월 중국 망명 직전 그가 남겼다는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이란 글귀를 생각한다. 또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사랑이 더 한층 강의(剛毅)하다고 한 그의 어록을 떠올린다. 32년 4월29일 의거 당일, 김구 선생과 태연한 안색을 하고 맛있게 조반을 비운 그의 모습을 그려본다.

거사 전날 6원을 주고 구입한 시계를 김구 선생의 헌 시계와 바꾼 그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그 헙헙한 기개, 그 불굴의 애국심, 그 선연한 의지, 그 단단한 절개는 7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조금도 훼절되지 않는다. 영원불멸의 초인(超人)일 터이다. 그에 비해 이기(利己)에 급급하고, 소탐(小貪)하며, 변덕에 변덕만을 일관할 뿐인 나는 그저 탄식할 뿐이다.

◆ 이국적 흥취를 느끼다

임정 청사와 홍구공원이 쇠락한 독립 성전에 대한 진한 아쉬움을 불러 일으켰다면 상해의 외탄거리에서 맞는 야경은 꽤나 화려하고 흥겨웠다. 상해에서 가장 붐빈다는 남경동로(南京東路)에서 시작되는 외탄거리는 특히 유럽풍의 석조건물들이 많아 이국적인 정취를 풍긴다.

23개의 은행이 밀집해 있는 이 거리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로 각광받는 곳이기도 한데, 명절이면 오후 5시부터 9시까지 극심한 혼잡을 막기 위해 모든 차량과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시킨다고 한다. 건물의 외부에는 근사한 조명을 달아 놓아 밤이 되면 더욱 고상한 정경을 펼친다. 예전에 독일 하이델버그의 고성(古城)을 보면서 받았던 감상과 어슷비슷하다.

황포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21세기 전략적 도시’ 푸동(浦東)은 각종 최첨단 건물을 뽐낸다. 그중에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 올랐다는, ‘신(新) 상해’의 상징물이 된 468m의 동방명주탑(東方明珠塔)이 네온불빛을 발한다. 홍콩의 백만불짜리 야경에는 못미친다 해도 예사로운 풍경은 결코 아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키높이 경쟁을 하는 빌딩들을 바라보자니 욱일승천하는 상해의 기운이 전해진다. 매섭게 몰아치는 강바람에서 변화의 기운이 묻어나는 듯도 하다. 그런데, 거대하고 찬란한 저 발전 뒤에 감춰진 이면과 고단함은 또 어떤 것일까 하는 돌연한 생각도 함께 피어났다.

중국 상해 글·사진 = 노중훈 기자 win@traveltimes.co.kr
취재협조 = 차이나팩 항공 02-732-4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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