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접 가보기 전 '고베'하면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나마 있다면 지난 95년 1월 발생해 6,400여명의 인명을 앗아간 고베 대지진 정도. 그래서인지 고베의 이미지는 '회색'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고베는 당시의 상처를 씻어내고 언제 그랬냐는 말쑥한 얼굴로 예전의 화사한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콘체르토 디너 크루즈
물론 모든 걸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지금도 고베시 와카마쓰초에 가면 무너진 건물벽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름하여 '고베의 벽.' 이 벽엔 지진으로 멈춰버린 '5시46분의 시계'가 걸려있는데, '미래를 향해 전진하되 지난 일은 잊지 말자'는 고베시민들의 다짐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셈이다. 또 한때 고베에선 '죽은 사람의 몫까지 열심히 살자'는 내용의 노래가 유행했다고 한다. 다소 살벌한 기운이 도는 게 일본인답다. 그런데 이렇게 과거의 교훈에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왜 그리도 역사를 왜곡하려 드는지 참 딱할 노릇이다.

◆ 음주, 온천욕 그리고 뱃놀이
돌이켜 보니 이번 일본 출장을 통해 고베에서만큼 신선놀음을 한 지역도 없는 듯하다. 물론 하나라도 더 보여주려는 현지 관광협회의 배려(?)로 아침 일찍부터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이곳저곳 가쁘게 돌아다닌 것은 오사카나 교토 못지않았지만 둘러본 곳의 특성상 훨씬 운치가 있고 느긋했다는 말이다.

자고로 알싸한 곡주 한 잔 걸치고 온천욕에 육신의 피로를 털고 선상에서 해풍을 쏘이며 주변 경치를 음미하면 그것이 신선놀음이 아니겠는가. 아침 일찍 찾은 곳은 하쿠쓰루 주조자료관(白鶴酒造資料館). 1743년 설립돼 우리나라의 진로처럼 유명한 '하쿠쓰루 주조사'가 만들어 놓은 곳으로 일본의 전통적인 술 빚는 방법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2층 마루를 꿰뚫고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저장용 목조통 등 당시의 도구도 고스란히 재현돼 있어 흥미롭다.

술박물관에 시음코너가 없다면 그것만큼 섭섭한 일도 없을 터. 아니나 다를까 간단한 견학이 끝나고 나니 시음용 곡주가 자그마한 잔에 담겨 찰랑거린다. 아침을 거른 터라 다소 저어하기는 했지만 냉큼 받아 들이밀었다. 목구멍을 타고 빈속을 가로지르는 게 짜르르하면서도 개운한 뒷맛을 남겼다. 한 잔 더 할까 하다 아침부터 불콰해질까 참았다.

음주 이후엔 높이 931m의 롯코산(六甲山)을 찾았다. 예서 보이는 밤경치가 일본 삼대 야경의 하나라는데 훤한 대낮에 찾은 관계로 별 무 소용. 인상 깊었던 건 사실 롯코산의 정경보다 산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였다. 현지 관광협회의 미야케씨가 뜬금없이 포지션의 'I Love You'란 노래를 틀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미야케씨는 지난해 오사카에서 열렸던 김건모 콘서트에도 참가했을 정도로 한국음악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포지션의 'I Love You'는 일본 노래를 리메이크한 것인데 미야케씨는 ""오히려 포지션의 것이 더 좋다""며 흥얼거렸다. 롯코산에서 몇 번 케이블카를 타고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도착한 곳은 근사한 온천욕이 기다리고 있는 아리마 그랜드 호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3대 온천 보양지의 하나로 알려진 아리마(有馬) 온천에 드디어 몸을 담구는데 철분, 라듐 등의 성분이야 문외한이라 알 바 없지만 어쨌든 '뜨겁지만 시원한' 목욕이다. 산 중턱에서 장쾌한 풍경을 발 아래 깔고 하는 온천욕이라 그런지 더욱 별스런 재미다.

◆ 스윙 재즈, 감상을 불러세우다
주지하다시피 고베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큰 항구도시. 당연히 어떤 형태든 간에 크루즈가 없을 리 만무한데, 우리 일행이 탄 배는 콘체르토. 저녁을 먹으면서 야경을 즐길 수 있는 디너 크루즈였다. 74m의 길이에 600여명 가량을 태울 수 있는 배로 우리 일행은 초청을 받은 탓인지 별실로 안내됐다.

중국식을 가미한 뷔페식, 맥주와 와인, 이야기꽃으로 한껏 분위기가 오를 무렵, 두 명주의 연주자가 들어왔다. 그 중 남자는 피아노 앞에 앉고 여자는 클라리넷(또는 오보에)을 손에 쥐더니 이내 스윙풍의 재즈를 뿌려댄다. 타국에서 그것도 바다 위 크루즈에서 듣는 재즈라. 나도 모르게 발뒷꿈치가 팔딱이고 엉덩이가 들썩거리고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토닥거린다.

온천욕으로 말끔해지고 좋은 음식과 좋은 술로 나긋해진 몸과 마음에 재즈 선율이 파고들어 형언할 길 없는 묘한 흥취를 끄집어낸다. 호흡이 가빠지며 감상의 절정에 치닫는데 아쉽게도 벌써 앵콜송인가 보다. 그런데 웬걸, 두 명의 연주자는 뜻밖에 아리랑을 선사한다. 간사이지방의 마지막 여정, 고베의 밤은 아리랑 선율 속에 그렇게 깊어갔다.

고베 = 글·사진 노중훈 기자 win@traveltimes.co.kr
취재협조 = 일본항공 02-757-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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