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종영된 TV의 한 사극(史劇)에서 인상 깊은 장면을 보았다. 허균이 역모로 처형 당하기 전 광해군이 친히 그를 불러 하문(下問)이 아니라 신하를 아끼는 마음으로 회유하다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었다. 세세한 내용까지 서술되어 있지 않을 경우 실록에 의한 역사 속 한 장면은 대본을 쓰는 작가의 상상에 맡겨야 하고 이는 나름대로 역사 드라마를 보는 즐거움중의 하나이다.

조선왕조 임금 중에 그렇게 한 신하를 향해 뜨거운 눈물을 흘린 왕이 얼마나 될까? 그 드라마의 내용은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과 그 당시 차별 대우를 받던 서얼들과 이들의 혁명을 다룬 것이었다. 이들 서얼들은 여주 남한강에 '윤리가 필요 없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무륜당(無倫堂)을 짓고 약탈을 일삼았는데 이들의 강도사건은 당시 집권세력의 영창대군 축출 계획으로 이용되어 비극적 사화(史禍)로 이어졌다.

피비린내 나는 옥사에서 많은 서출들이 처형당하고 서출 출신들과 친분이 있던 허균은 신변 안전을 위해 집권세력과 의도적으로 가까이 하고 직위도 올라 형조 판서에까지도 오른다. 중국 사신으로 갔을 때에 조선 종묘사에 대한 잘못된 기록을 바로 잡아 광해군의 총애와 찬사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 동안 자신이 모아온 세력을 바탕으로 혁명을 꾀한다. 말이 혁명이지 당시로서는 입밖에 내도 삼족을 멸하는 역모였다.

그의 사상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소설 홍길동전에서처럼 서얼 차별을 없애고 신분 계급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광해군의 입장에서 보면 그 자신도 서자였고 세자 책봉 과정에서도 장자(長子)를 제치고 왕위에 올라 정통성 시비에 휘말렸으며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왕위를 넘겨 받았다.

왕권에 도전하며 끊임 없이 왕권을 위협하던 동복형을 죽이고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여 부정적인 이미지로 비춰졌지만 인조 반정으로 보위에서 쫓겨날 때 까지 그가 이룬 외교적 업적과 실리주의자로서의 치적은 다시 조명되고 있다. 광해군이 폐위된 후 아들과 며느리는 불행하게 죽고 부인과도 사별하지만 그는 온갖 수모를 다 겪으면서도 18년간을 초연하게 더 살았다.

어쩌다 본 드라마라서 전체적인 줄거리 전개는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됐는지 자세히 모르겠지만 혁명을 꿈꾸는 허균의 입장에서 보면 전제군주는 물러 나야 하는 것이었고 왕권을 수호해야 할 광해군으로서는 혁명이든 개혁이든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고자 했던 허균은 역모의 괴수로 회유의 대상이 아니었다.

마치 교리문답을 나누듯 독백 형식으로 두 사람이 상대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극중 장면은 비록 그것이 시청자를 위해 만든 픽션이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너무나도 쉽게 사람을 잘 버리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뜨겁게 다가왔을 것이다. 잘생긴 TV 연기자가 광해군 역할을 하고 신하 앞에서 흘린 그 처연한 눈물 장면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람을 진정으로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어떤 것인가라는 생각을 깊게 해본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위해 목숨도 건다는데….

호주정부관광청 한국지사 부장 schang@at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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