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섣부른 예단은 금물이다. 미처 가보지 않은 곳, 느껴보지 못한 곳에 대해 편견에서든 착각에서든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는다는 것은 무수한 즐거움으로 가득한 여행이라는 보따리에 족쇄를 채우는 일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 잘못된 선입견이 오히려 더 큰 기쁨을 안겨줄 때도 있다. 말레이시아에서처럼 말이다.

◆ 하나의 나라 여러 개의 문화

흔히들 '랑카위 보면 볼 것 다 봤다'는 식으로 말레이시아를 무미건조한 곳으로 표현하곤 한다. 특히 수도 콸라룸푸르에 대한 평가는 가혹하기 이를 데 없어 비행기 스케줄 상 어쩔 수 없이 대여섯 시간 경유하는 것만으로도 족한 곳으로 단정하고 만다. 하지만 이는 무관심과 메마른 호기심의 소치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색색이 이어지고 층층이 쌓인 복합적인 문화를, '진정한 아시아, 말레이시아(Malaysia, Truely Asia)'라고 자신 있게 부르짖을 수 있는 그네들만의 올곧은 자존심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지도는 노랑, 보라 등 13가지 색깔로 칠해진 게 일반적이다. 각 색깔은 말레이시아를 구성하는 13개의 주를 상징하는 동시에 주 마다 일궈낸 독특한 전통과 문화를 나타낸다. 13개의 색깔만큼 다채롭고 화려한 문화가 말레이시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13개의 색띠는 말레이시아가 다인종 국가라는 점도 암시한다. 말레이계뿐만 아니라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등 비슷하지만 분명 농도에서 차이를 보이는 피부색들이 합쳐져 제3의 색깔을 창조해냈다. 종교 또한 회교에서부터 기독교, 카톨릭, 불교, 힌두교 등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런 다문화성, 다인종성으로 인해 말레이시아를 방문하는 외지인들은 한 곳에서 동시에 여러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새까만 '두당(Dudeng)'으로 얼굴을 칭칭 동여맨 회교도 여성의 수줍은 미소에서부터 이마에 커다란 점을 찍은 인도 소녀의 커다란 눈망울, 끊임없이 계속되는 중국인들 대화 소리의 귀 따가움까지 죄다 느낄 수 있다. 이슬람 사원과 불교 사찰, 인도 수도승들의 고행 장소를 약간의 발품으로 동시에 비교할 수 있다. 이런 배경을 염두하면 다양성을 주춧돌 삼아 우뚝 솟은 말레이시아의 자존심도 그리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을 터이다.

◆ 페트로나스 쌍둥이 빌딩

말레이시아의 자존심, 특히 아시아 국가로서 서방 국가에 갖는 꼿꼿한 자존심은 단연 '페트로나스 쌍둥이 빌딩(Petronas Twin Tower)'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높이 452m의 마천루가 풍기는 위상은 물리적 차원의 높고 낮음을 초월한다. 외환위기의 거센 폭풍이 불어 닥쳤을 때도 이는 '서방의 신경제주의가 꾸며낸 음모에 다름없다'며 IMF의 구제금융을 거부하며 독자적인 목소리를 냈던 마하티르 총리의, 또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말레이인들의 자신감이 잉태된 곳이지 싶다. 미국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425m), 월드트레이드센터(442m), 시카고의 시어즈 빌딩(443m)으로 이어지는 세계 최고(最高) 건축물의 바통을 지난 96년 이어받아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동양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특히 두 동의 건물 중 정문에서 볼 때 왼쪽편인 2관 건물을 한국의 삼성건설이 시공했다는 점에서 실제 그 앞에 섰을 때의 감회가 각별하다. 세계 최고 높이의 건물을 세웠다는 자존심은 그것을 소유했다는 자존심을 거뜬히 압도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 동은 일본의 건설사가 지었는데 이 때문에 건축 당시부터 한국과 일본의 기술 대결전으로 큰 화제를 모았었다. 건축물 자체로는 승부가 나지 않았지만 42층의 연결다리(Sky Bridge)가 한국이 제시안 시공안대로 들어섬으로써 승리의 영광은 결국 한국이 차지하게 됐다. 이 연결다리는 숀 코네리와 캐서린 제타 존스가 주연한 영화 '엔트렙먼트'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한 동은 건물 소유사인 페트로나스 정유회사를 비롯해 각종 사무실이 들어차 있고 다른 한 동에는 고급 브랜드들이 줄지어 입점한 쇼핑가에서부터 극장, 패스트푸드, 페트로나스 필 하모닉 홀, 갤러리 등이 들어서 있어 관광객과 현지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선입견을 깨는 말레이시아의 현대적이고 화려한 면모를 보여준다.

◆ 콸라룸푸르는 살아있다

페트로나스 빌딩에서 깨지기 시작한 선입견은 건물 뒤편으로 넓게 펼쳐진 'KLCC 공원'에서 완전히 뒤바뀐다. 푸른 잔디를 조깅 코스가 이리저리 가르고 호젓한 호수는 쉼없이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낸다. 어린이 풀장에는 물놀이를 즐기는 꼬마들과 이들을 지긋한 미소로 바라보는 부모들로 빼곡하다. 야자수 밑 그늘에서는 연인들이 달콤한 데이트를 즐기고 소풍 나온 가족들은 느긋한 오후 한 때를 즐긴다. 평화롭고 잔잔한 그 분위기, 이게 바로 말레이시아의 진정한 색깔이구나 싶다.

이왕 시작한 고(高)건물 투어인 만큼 우리네 남산타워로 볼 수 있는 '콸라룸푸르 타워'도 시티투어에서는 빼놓지 말아야 할 명소다. 421m의 높이니 분명 어지간한 높이는 아닌 셈이다. 전망대까지 오르는 데 엘리베이터로 55초가 걸릴 정도다.

높이를 향한 말레이인들의 집념은 '하이랜드(High Land)'라는 단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말레이인들이 더위를 피해 찾아가는 고산지대의 휴양지를 일컫는 말로 말레이시아의 더운 기후가 자연스레 탄생시킨 것이다.

4개의 하이랜드 중 가장 유명한 곳은 해발고도 2,100m로 말레이시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인 '겐팅 하이랜드(Genting Highland)'다. 연중 섭씨 17도를 유지하는 선선한 기후와 아직까지도 호랑이와 코끼리가 살고 있다고 할 정도로 울창한 수풀 등의 자연적 조건도 조건이지만 콸라룸푸르 시내에서 자동차로 2시간이면 닿을 수 있다는 점과 산 정상에 테마파크를 비롯해 6개의 호텔, 말레이시아 최대의 카지노, 36홀에 이르는 골프장, 각종 위락시설 등이 들어서 있기 때문에 현지인들에겐 피서지로 관광객들에겐 관광명소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3.4km로 동남아시아 1위의 길이를 자랑하는 케이블카가 끊임없이 관광객을 위 아래로 실어 나르는 모습이며, 구름마저 걸쳐 가는 고산지대에 들어선 대형 호텔이며 놀이공원, 카지노 시설과 그 속에 깃들어 있는 말레이시아인들의 풋풋한 미소가 진정한 아시아 말레이시아의 색채를 더욱 진하게 한다.

말레이시아 글·사진=김선주 기자 vagrant@traveltimes.co.kr
취재협조=말레이시아 관광청 02-779-4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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