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Santiago)에 도착하자 쾌청한 날씨가 먼저 반긴다. 그도 그럴 것이 산티아고에서 비가 오는 날은 연간 20일 정도. 그만큼 화창하고 건조한 기후가 산티아고의 상징이다. 칠레를 두고 3W의 나라라고 하는데 와인(Wine), 여자(Woman), 날씨(Weather)를 가르키는 것이다.

- 칠레를 가다 -
1. 푸에르토 몬트
상. 호반의 넉넉함에 취하고
하. 만년설의 시원함을 가슴에 담고
2. 산티아고, 자유와 열정의 도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1989년 말 TV에서 방영했던 외화 드라마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를 통해 산티아고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건조한 기후가 산티아고의 상징인데 '비가 내린다'는 제목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자못 궁금하다.

산티아고에 앞서 먼저 칠레라는 나라를 얘기하고 싶다. 서쪽으로는 태평양을, 동쪽으로는 안데스산맥을 마주하고 있는 칠레가 지구상에서 남북 방면으로 가장 긴 나라(남북 약 4,200km)라는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막부터 빙하까지 위도에 따른 다양한 기후와 풍광을 지닌 나라라는 건 언뜻 떠오르기 쉽지 않다.

북부의 아타카마 사막은 지구상에서 가장 건조한 기후를 지니고 있고 중남부는 숲과 호수, 늪지대의 쾌적한 기후를, 남쪽으론 피요르드와 빙하를 볼 수 있는 웅대한 자연의 신비를 간직한 곳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남미 국가들이 그렇지만 식민과 독립,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 쿠데타와 독재, 미국의 간섭까지 우리와 비슷한 격동의 근현대사를 가지고 있다는 동질감이 존재한다.

여느 도시와 다름없이 산티아고도 신구(新舊)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남미에서도 아르헨티나 다음으로 가장 유럽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는 도시답게 스페인 식민시절의 특징을 나타내는 오래됐지만 화려한 건물들이 구도시를 이루고 신도시는 각종 공장과 현대적인 고층 빌딩들이 즐비하다. 산티아고 시내 관광은 누가 뭐래도 모네다 궁전에서 시작된다. 1810년에 지어져 대통령의 집무실로도 사용된 아름답고 위엄높은 궁전인 이곳은 피노체트 집권시절 학살 장소로서 더욱 악명이 높다.

피노체트는 칠레의 국토길이만큼이나 긴 17년간 집권했고 여든을 훨씬 넘긴 지금까지도 칠레 군부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다니 구체적인 사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잠시나마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권을 가졌던 이 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정치적, 역사적 부침을 겪었을 것이란 짐작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일까. 근엄한 경비병의 표정이 어두운 역사를 지닌 회갈색 딱딱한 건물과 너무도 어울린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발랄한 신세대 칠레 여학생들이 웃음소리를 높이며 단체로 궁전 관람에 나서고 관광객들은 경비병의 표정과는 상관없이 옆에서 온갖 포즈를 취한다. 궁전 앞 광장의 벤치에선 연인들이 남의 눈도 아랑곳없이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자못 긴장했는데 이들을 보니 슬며시 기분이 들뜬다.

이러한 들뜬 기분은 오이긴스 거리를 거쳐 구시가지의 중심 아르마스(Armas) 광장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고조된다. 오이긴스 거리는 산티아고 최고의 번화가. 각종 쇼핑상점들이 즐비한 우리의 명동과 같은 곳이다. 아르마스 광장 주변에는 역사적인 건물들이 잔뜩 모여 있다. 16세기 건축된 대성당을 비롯해 중앙우체국과 시청사, 1808년에 건축된 궁전을 이용한 국립역사박물관, 산티아고 박물관 등이 즐비하다.

거리와 광장의 바닥은 아스팔트가 아닌 돌들이 모자이크를 이루며 깔려있다. 해가 긴 그림자를 만들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 하루 일과를 막 끝내고 몰려나온 온갖 사람들로 거리는 붐빈다. 온몸에 흰색, 노란색, 금색 등을 칠한 판토마임 배우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눈길 끌기에 열중하고 짚시들이 곳곳에서 노래와 춤, 연기로 즉흥 공연장을 만든다.

여기저기서 캔버스를 펼쳐들고 저렴한 가격에 즉석 초상화들을 쓱쓱 그려낸다. 벽걸이 등 다양한 기념품들을 즉석에서 만든 시연을 하나 하나 구경하는 것도 재밌다. 흘깃 눈인사를 보낼 뿐이지 지나친 호객 행위는 하지 않아 둘러보는 맘도 편하다. 물론 주머니의 동전이 목적이겠지만 거리의 배우들은 관광객들의 손을 붙잡기에 적극적이다. 사진이라도 찍으려고 하면 배우들은 흥미로운 포즈를 취해주고 춤을 추는 댄서들은 사람들을 무대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런 광장에 단골로 출연하는 아이스크림 리어커며 간이 꽃가게, 심지어 각종 신문과 잡지들이 빼곡히 진열된 가판대까지 즐거운 볼거리가 그득그득하다. 강렬한 빨간색이 인상적인 공중전화부스까지 사진의 배경이 된다. 광장 중앙에는 마침 책 염가판매장도 펼쳐졌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서둘러 발걸음을 산티아고의 남산이라 불리는 산타루치아(Santalucia) 언덕으로 옮겼다. 일몰과 야경을 보기 위함이다. 일반적으로 산티아고에서는 간단히 시내관광을 끝내고 주변에 위치한 해변 휴양지인 비냐델마르나 발파라이소로 이동하지만 이번 여행에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산타루치아는 '바람의 언덕'이라고도 불린다. 과거엔 요새로 사용됐던 곳이고 현재는 정상에 성모 마리아 상이 모셔져 있으며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애용되고 있다. 언덕 아래 입구에는 한인 타운이 형성돼 있고 조금 올라가면 이색적인 라이브 펍과 카페, 레스토랑, 나이트클럽 등이 이방인의 눈길을 끈다. 차는 구불구불 올라가고 해가 사라진 대지 사이로 어둠이 스며든다.

차창 너머 살짝살짝 내려다보이는 산티아고 시가지. 남은 붉은 기운이 아늑하게 내려앉고 하나둘씩 불빛들이 새로운 표정으로 수놓기 시작한다. 까무룩 잠이 들었던 일행들이 서로를 깨우며 창밖을 보라 웅성거린다. 숨이 막힌다. 끝이 보이지 않게 넓은 도시가 이글거린다.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아르마스 광장의 흥분이 절정을 이룬다. 달리고 있는 차안이라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 없어 너무 안타깝다. 언제 다시 이 먼 곳까지 올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조금이라도 바깥 풍경을 마음에 담아두려고 눈을 떼지 않은 것 뿐.

칠레 산티아고 글·사진 = 김남경 기자 nkkim@traveltimes.co.kr
취재협조 : 란칠레항공 02-775-1500, 라틴투어스 02-756-2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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