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차와 운하, 예쁜 집과 꽃이 있어 ‘서정적이다. 동화 같다’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나라가 네덜란드다.

네덜란드는 델프트, 에담, 라이덴, 알크마르 등 작은 도시들이 훨씬 정감 있고 아름답다. 그런가하면 도시마다 분위기가 달라 여행의 정취에 흠뻑 젖는다. 금요일 오후면 전국 어느 곳이나 마을 사람들 모두가 광장이나 노천 카페에 모여 웃고 환담하며 맥주나 음료를 마신다.

여름날이면 푸른 초원으로 자전거의 행렬이 이어지고 웃통을 벗은 젊은이들이 여기저기 첨벙, 운하로 뛰어든다. 이방인 누구라도 그 평화스러움에 매료된다.

한 나라가 자국의 관광 홍보를 하려면 뚜렷한 관광 심볼이 중요하다.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 ‘중국의 만리장성’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는 아직도 외국인들이 한국하면 떠올릴 뚜렷한 관광 심볼을 찾지 못해 고심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대수롭지 않은 몇 개의 관광 심볼로 외국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나라다. 우리는 네덜란드하면 운하, 튤립, 나막신 등을 자연스레 떠올린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네덜란드의 관광 심볼의 주장격은 풍차다.

전성기에는 국가에서 바람세라는 것을 징수할 정도로 많아, 9천 개가 넘었던 것이 현재는 그 수가 줄어들어 1천여 개가 남아 있다. 그러나 풍차는 오늘날에도 국가 관광 심볼로 국가 수입 증대에 옛날 못지 않은 기여를 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우리와 인연이 깊은 나라이다. 히딩크 감독이 월드컵 4강의 위업을 달성한 공로로 대한민국 명예 국민증을 받았다지만 그보다 대선배격인 박연이 있다. 17세기 해양무역강국이었던 네덜란드는 당시 배를 타고 인도네시아와 일본을 오고 갔다.

본명이 벨테브레였던 박연은 1627년 일본을 향해 항해하던 중 제주도에 표착했다. 이후 귀화해 훈련도감에서 근무하며 명나라에서 들여온 홍이포(紅夷砲)의 제조법과 조작법을 지도했다. 그는 조선 여인과 결혼해 남매를 두었다.

그러나 정작 당시의 조선을 세계에 알린 것은 1653년, 일행이 탄 배가 난파하여 제주도에 상륙한 하멜이었다. 그는 14년 간 이 땅에 살다 탈출하여 ‘하멜표류기’로 알려진 기행문을 발표해 조선이라는 나라를 최초로 유럽에 소개했다. 그는 놀랍게도 한글을 가장 우수한 소리글자라 칭송했다.

한땐 히딩크를 한국축구대표팀 감독직에서 갈아치우라 아우성이더니 이제는 너나할 것 없이 그를 영웅으로 칭송한다. 고려 광종9년(956), 귀화 외국인이기에 모든 연고를 배제하고 공평한 관리 등용의 길로 과거제도를 정착시킨 중국 후주 사람 쌍기에 견주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우리가 월드컵 4강이 되었다는 사실과 과연 그것이 히딩크의 능력 덕인지 어리둥절하다.

단 그가 한 말들이 기억에 남는다. 이태리가 우리에게 지고 “한국이 심판을 매수했다”느니 말이 많았을 때 그는 “선수든 심판이든 누구나 실수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진 팀은 궁시렁거릴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 조용히 거울을 보며 자신의 잘못을 곰곰이 반성해야 한다”고 일갈한 것과 “운도 실력이다”라는 말이다.

여행전문 칼럼니스트 magnif@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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