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항공 비행기를 타고 란저우로 간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 나무가 거의 자라지 않는 황무지산에는 간간히 작은 나무와 풀들만이 보인다. 자연지형부터 지금까지 보아온 중국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 곳이 바로 감숙성의 성도이자 황하강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란저우다. 한국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곳에서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는 란저우사범대학에서 유학하고 있는 한국유학생. 이 곳에 한국인이 70~80명 정도 거주하는데 그 중 40명 정도가 유학생이며 나머지는 주로 여행사나 무역, 식당을 하는 자영업자라고 전한다.



-양가죽 뗏목 타고 황하를 건너

란저우는 중국의 지도자 후진타오가 문화대혁명 때 감숙성 수력발전소 노동자로 있었던 곳으로, 인구의 반 이상이 문화대혁명 당시 하방(지식인들을 강제로 농촌으로 보낸 것) 때 란저우로 와서 정착하게 된 사람들이다.

황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공존공생의 도시 란저우는 물레방아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바로 수차(수레바퀴) 때문이다. 황하의 물을 퍼 올려 농업용수로 사용하게끔 만들어진 수차는 모양은 물레방아와 비슷하나 크기가 무척 크다. 명나라 때부터 만들어진 이 수차는 황하 양쪽으로 1952년까지 모두 252개가 세워졌으며, 이를 기념한 ‘물레방아 공원’에는 다양한 수차가 전시돼 물의 도시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란저우 황하 강변공원에는 그곳만의 재미있는 풍경이 하나 있는데 바로 오랜 옛날부터 사용해 왔다는 양가죽 뗏목이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양고기를 즐겨먹는 회교도의 종교적 식습관 때문이었는지 뗏목에 사용된 것은 돼지가 아닌 양가죽이었다. 양을 잡아 칼집을 내지 않고 목 부분을 통해서 뒤집어 풍선처럼 부풀린 양가죽 뗏목은 지금은 관광객들의 인기상품이다.



-황하를 보려거든 백탑산(白塔山)으로...

란저우에서 황하를 건너려면 양가죽 뗏목 외에 1907년에 독일의 기술력으로 만든 중산교(中山橋)을 걷는 것도 한 방법이다. 독일인이 100년은 끄떡없을 거라 자신했던 중산교를 걸어 바로 앞에 보이는 백탑산 정상에 오르면 란저우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곳에서 차 한 잔의 여유를 보내고 내려와 실크로드의 다음 도시로 갈 채비를 한다.

-만리장성의 서쪽 출발점 ‘가욕관’

지금까지는 시간을 고려해 비행기로 이동을 했지만, 이제 기차와 버스로 우루무치까지 이동한다. 란저우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밤을 달려 다음 날 아침에 도착한 가욕관. 군사적인 기점으로 명나라 때 세워진 가욕관은 만리장성의 서쪽 끝에 세워진 성곽이다. 당시에는 2백~3백 명 정도의 군사가 거주했다고.

성곽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도 가욕관인데 도시 가욕관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952년 착공된 란신철도(란저우~우루무치)가 이곳을 지나면서 인구가 많이 늘었고 60년대 새로 발전된 철강공업도시로 경제적으로는 넉넉한 곳이다. 가욕관 성곽에 올라 주위를 바라보면 저 멀리 눈 덮인 천산(天山)산맥이 이어져 척박한 땅 위로 만리장성의 시작점이 보인다. 북방의 유목민족과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기에 이곳에까지 만리장성을 쌓을 생각을 했을까. 가욕관에는 만리장성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장성박물관’도 자리했다.

가욕관에서 돈황으로 가는 길, 이채로운 풍경들이 이어진다. 사막 위에 풍력발전소가 세워져 있고, 중간 중간 흙으로 쌓아올린 거의 다 무너져 내린 성벽들도 보인다. 가는 길 내내 고속도로 건설 현장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여기 건설현장에서 돌을 나르는 사람들은 과거 만리장성을 쌓은 사람들처럼 일반 서민들이리라. 그런 그들이 21세기 새로운 실크로드를 만드는 주인공인 셈이다.

실크로드를 여행하다 도시에 도착해 갈 때면 공통된 풍경이 익숙하다. 사막이 이어지다 물이 보이고 나무가 보이면 도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막에서 물이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로 돈황 막고굴 벽화에 그려진 것처럼 물이 있는 곳은 그들에게 천국과도 같았을 것이라고 미뤄 짐작해본다.

둔황은 기원전 11년, 한 무제가 이곳 흉노를 물리치고 한족을 이주시켜 서역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그렇게 개척된 실크로드는 명나라 때 해상로가 발달되기 전까지 천산 남북로가 만나는 실크로드의 정치, 경제적인 중요한 지역이었다고. 서역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으로 어느 도시보다 영화를 누렸던 도시 돈황은 이름 자체도 ‘크게 번성하다’란 뜻을 지녔다. 그러나 그런 영화도 명나라 때 해로가 개발되면서 점차 사라졌다.



-1000년 문화박물관 돈황 막고굴

그렇게 잊혀져 가던 돈황이 다시 세상을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00년 막고굴이 발견되면서 부터다.

중국의 3대 불교석굴 중 하나인 막고굴은 서기 366년 악준이라는 승려가 처음 뚫기 시작했다. 자갈과 모래가 혼합된 사암에 촘촘히 굴을 뚫고 들어가 밀짚과 진흙으로 벽을 도배하고 횟가루를 덧칠한 후 불화를 그리고 불상을 만든 것이다. 원나라 때까지 1천여 년 동안 계속 뚫고 만들진 막고굴의 가치는 작품과 더불어 1000년이란 시간의 흐름 자체에 있다.

다시 나타난 막고굴에 남아있는 석굴만도 550여 개, 불상과 벽화가 있는 굴은 474개다. 이외에 불화와 불상 못지않게 17동에서 발견된 한문, 산스크리트어, 위구르어, 티베트어, 몽골어 등 다양한 문자로 쓰인 문서들도 중요한 자료다. 잘 알려진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그 속에서 발견됐다.

가이드는 막고굴 끝 쪽으로 보면 강이 하나 흐르는데 그 옆으로 벌집처럼 굴들이 뚫려있다며, 그 속에서 안료 등이 발견돼 화공들의 주거지였음이 밝혀졌다고 한다. 그 시대의 천대받던 화공들의 손에서 빚어진 자연 속 화랑 막고굴이 있어 그 삭막한 사막이 더욱 아름다워 보이다니.

막고굴은 현재 작품의 훼손 등을 막기 위해 10여개 정도의 굴만 개방을 하고 있으며, 카메라를 포함한 짐은 보관소에 맡기고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현재 3명의 한국어 통역 가이드가 배치돼 있어 인민폐 50위안 정도면 한국어 가이드의 설명과 함께 관람할 수 있다. 돈황 벽화와 불상을 미리 만나보고 싶다면 중국 돈황연구원에서 만든 홈페이지
(http://www.dha.ac.cn./lvyoujiedai/main.htm)에 가면 멋진 사진을 볼 수 있다.



-도시 속 사막 명사산, 사막 속 초승달 오아시스 월아천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야” 어린왕자의 한 구절을 한 번쯤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돈황 명사산에 가면 요즘은 비록 관광객들의 유입과 인구의 증가로 물 사용량이 많아져 크기가 30년 전에 비해 3분의 1로 줄어들었지만 3000년 이상을 마른 적 없다는 초승달 모양의 월아천이라는 호수가 있다.

월아천이 있는 명사산은 상상 그대로의 사막이다. 이 모래 사막의 모래가 한국에 까지 피해를 주는 황사라고 여기기 쉽지만, 사실 명사산의 고운 모래는 황사와는 상관이 없다. 황사바람은 사막화가 진행되는 신장 자치구의 땅의 건조한 미세 먼지가 강한 바람을 타고 오는 현상이기 때문. 문득 돈황이 아름다운 건 명사산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고, 그 명사산이 아름다운 건 보석처럼 빛나는 월아천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곳에서 모래썰매와 낙타 그리고 저녁노을은 삶을 살아가면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또 다른 도시로 이동한다.

+++++플러스 α+++++

★ 돈황고성 - 돈황 시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1987년 중-일 합작으로 만든 영화 <돈황>을 찍으면서 지은 세트장이 나온다. 송대 돈황 성곽과 거리를 제현한 이 영화세트장은 돈황에 왔다면 꼭 한번쯤 들러볼만한 곳이다.

★ 디카를 가지고 여행할 때 - 중국을 여러 날 여행하다보면 노트북을 들고 다니지 않는 이상 늘 메모리 카드의 용량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 이용해보길 권하는 곳이 바로 코닥 전문점. 코닥은 노란색 가판에 중국어가 쓰여 있어 찾기 쉽다. 그 중 규모가 제법 커 보이는 곳에 들어가면 대부분 메모리 카드에 찍은 사진을 들어가면 대부분 메모리 카드에 찍은 사진을 CD에 구워준다. 요금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CD 1장당 10~20위안 정도. 중국어로 '커루(刻錄)라고 발음하면 알아서 해준다.

글·사진=Travie writer 박임자 freebelt@naver.com
취재협조=상해항공 02-317-8899
테마중국여행 02-736-8888

"
저작권자 © 여행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