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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찾아 떠난 여행
아련한 밀애의 공간을 엿보다



네비게이터의 낭랑한 음성 안내가 “목적지 근방에 도착했습니다”를 연신 내뱉을 무렵, 은희네 집을 찾지 못해 동화교에 멈춰 섰다. 영화 도입부, 영수가 희망의 집을 찾아 버스로 건너던 다리다. 차에서 내려 주섬주섬 지도를 펴 들 때였을까. 호미를 어깨에 맨 마을 주민들이 낯선 손님을 향해 다가선다. “뭐 볼 게 있다고 여기꺼정 왔댜?” “영화 촬영지 찾아왔어요.” 아~거그? 우리 집 바로 옆이여. 퍼뜩 따라와~

■ 전북 장수

#1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 행복한가요?

간경변을 앓던 영수(황정민 분)에게는 공기 좋고 깨끗한 요양지가 절실했다. 하지만, 클럽을 운영하며 흥청망청 삶을 탕진하던 남자에게 시골만큼 불편하고 끔찍스러운 건 없었다. 양주 대신 막걸리와 라면 한 그릇에 행복할 수 있는 곳이라니. 요양원 ‘희망의 집’으로 향하는 길, 그는 누구보다 두려워 보였다. 영화는 그렇게 영수가 오지 중의 오지 ‘전북 장수’로 찾아들면서 시작된다.

-여전히 남아있는 그들의 보금자리 동화마을

서울에서 차로 4시간 거리. ‘행복’을 품은 전북 장수군이 자리한다. 영화에서 느낀 감수성을 맛보고 싶은 이라면 영수의 행적을 고스란히 따라가 보도록 하자. 덜컹이는 기차와 촌스런 주홍빛 무진장 버스를 갈아타면 그들의 보금자리에 도착한다. ‘장수’라는 지역의 특수성을 이해하기 위해선 승용차를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꼴딱 산 하나를 넘어 굽이진 오르막길을 달리다 보면 발아래 요새처럼 숨겨진 마을들을 조망하게 된다. 역시 풍문대로 이곳은 오지 중의 오지라 불리는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 내륙임에도 불구하고 섬처럼 비밀스레 자리한 마을에 홀로 초대된 기분이다.

평지를 채우는 건 푸른 상추밭과 재잘대는 개울가, 작은 이정표와 느릿한 경운기뿐이다. 그 흔한 기념 간판과 낙서, 연예인들의 사인 한 장이 없다. 나뭇가지의 수런거림과 외지인을 향해 짖어대는 ‘상근이’의 목청만 적막을 메울 뿐. 그래서 ‘행복’의 흔적은 도리어 배가 된다. 불어오는 바람에는 은희(임수정)의 가는 기침 소리가 섞이고, 먼지 폴폴 날리는 버스 뒷자락엔 영수가 슈퍼 평상에 앉아 라면 한 그릇을 몰래 비워내고 있을 것 같다.

사실, 은희네 집을 찾기란 쉽지 않다. 안내 간판 하나가 없으니 자칫 고만고만한 마을 사이에서 헤맬지도 모를 일이다. 네비게이터의 낭랑한 음성 안내가 “목적지 근방에 도착했습니다”를 연신 내뱉을 무렵 나 역시 은희네 집을 찾지 못해 동화교에 멈춰 섰다. 영화 도입부, 영수가 희망의 집을 찾아 버스로 건너던 다리다. 차에서 내려 주섬주섬 지도를 펴 들 때였을까. 호미를 어깨에 맨 마을 주민들이 낯선 손님을 향해 다가선다. “뭐 볼 게 있다고 여기꺼정 왔댜?” “영화 촬영지 찾아왔어요.” “아~거그? 우리 집 바로 옆이여. 퍼뜩 따라와~” 중년의 농부는 진흙 묻은 호미괭이를 뒷좌석에 툭툭 던져놓고는 조금 전 우리가 지나쳤던 하동마을 어귀로 안내한다. 장수군 번암면 하동마을. 이정표를 지나 오른쪽으로 내다본 곳에 그제야 은희와 영수의 집이 보인다. 검붉은 상추밭 위로 집 한 채가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다.

집은 천주교 공소를 운영하는 이안나 할머니의 빈집에 세트를 지어 촬영했다. 그 앞으로 차 한 대 간신히 지날 만한 도로가 나 있는데, 세간 살림을 가득 싣고 희망의 집을 나오던 이삿짐 트럭이 바로 이 즈음에 머물렀다. 2006년 가을, 촬영이 끝나며 인적이 끊긴 빈집에는 무성한 들풀만이 마당 앞을 어지럽힌다. 영수의 팔짱을 끼고 폴짝 폴짝 신나게 이곳을 뛰어다녔을 은희의 마음을 조심스레 따라가 본다. 표현하기 힘든 감정의 굴곡이 주변 작은 것 하나에도 마음을 쓰게 만든다.

온기가 사라진 빈집이지만, 여전히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흐르고 있다. 서울 간 뒤 소식이 끊긴 영수를 가슴 졸이며 기다리던 은희의 애달픈 마음처럼 졸졸졸 고장 난 수도꼭지로 가만히 손을 가져가 본다. 한데 쭈그리고 앉아 옛 애인 수연(공효진)을 위해 빨간 사과를 씻던 은희의 복잡한 마음도 아마 이곳에서였을 테다.

집의 구조는 영화 속 그대로다. 에메랄드 빛깔 미닫이문을 경계로 한쪽은 침실, 또 다른 쪽은 거실. “너, 천천히 밥 먹는 거 지겹지 않니?”라며 이별을 고하던 영수와 그런 애인 앞에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던 은희. 모두가 이 공간에서 행복하고자 했을 테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남은 빈집은 두 주인공의 행복한 추억보다는 쓸쓸하고 외로웠던 은희의 이미지를 닮았다. 늘 영수를 기다렸던 은희의 심정은 마당에 서서 마을 어귀를 내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집 왼편으로 난 오르막길은 바로 그들의 행복이 파기되는 장면을 암시하던 공간이다. 마른 나뭇가지들이 나뒹구는 조그만 길 위로 은희는 터질 듯한 심장을 안고 곤두박질쳤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수백 번 죽음을 맛보는데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왼쪽 심장을 안고 바닥에 쓰러진 은희의 눈 위로 서늘한 겨울 하늘이 보인다. 나도 따라 봄빛을 머금은 그곳을 올려다본다. 하늘은 눈이 부시게 파랬다



-버스정류장과 우리슈퍼, 원지지 마을

동화마을에서 동화교를 건너 차로 5분 거리에 영화 속 또 다른 공간이 있다. 병풍처럼 둘러싼 마이산 아래 자리한 ‘원지지 마을’은 은희와 영수가 사랑을 키우던 만남의 광장이다. 계곡이 흐르는 마을 어귀에는 글귀조차 희미한 버스 정류장과 우리슈퍼로 짐작되는 폐가가 서로를 마주본다. 하동마을 슈퍼와 버스 정류장이 그들 보금자리 앞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다뤘다면, 원지지 마을은 연애 초반의 풋풋한 기운을 담았다.

시골 버스가 뿌연 먼지와 함께 사라진 정류장, 영수는 낡은 트렁크와 함께 불편히 선다. 슈퍼에서 주섬주섬 소주 한 병을 들고 나와 평상에 앉자 은희는 머쓱한 표정으로 자리를 피해 일어난다. 그러고는 몰래 손거울을 꺼내 자신의 얼굴을 살피던, 하얀 플레어스커트의 여인. 영화 도입부에서부터 시종 일관 막걸리와 소주, 라면 등을 영수가 줄기차게 먹어대던 ‘우리슈퍼’가 바로 이 마을 입구에 자리한다. 폐가로 버려진 곳을 개조한 촬영팀은 이후 간판을 함께 떼어갔다고 한다. 장독대가 올망졸망 얹어진 버스 정류장에 앉아 계곡물 흘러가는 소리에 가만 귀기울이면, 하루 두 번 쯤 찾아오는 시골 버스가 영수처럼 어느 사연 많은 도시인을 토해내고 사라질 것만 같다. 공간과 시간, 문명이 만든 그 모든 걸 잊고 온전한 자연으로 돌아가는, 이곳은 장수다.

-자장면과 영화관 데이트 번암시장

오전 내내 주인공들의 자취를 따라 마을 이곳저곳을 거닐다 보면 점심무렵, 시장기가 든다.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시골 바람을 맞으며 버스를 타고 나들이를 떠난 두 사람. 첩첩산중에 자리한 영수와 은희에게 시골 장터는 더 없이 근사한 데이트 장소였다.

원지지 마을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자리한 ‘번암시장’은 영수와 은희가 사랑을 확인한 장소다. 여느 5일장처럼 엿장수와 뻥튀기 트럭, 트로트 메들리와 생필품 도구들이 길바닥에 늘어설 것 같지만, 장터는 생각보다 소담하고 정갈하다. 농협과 이발소, 단란주점과 호프집이 각각 하나씩 늘어선 시장 통에는 영수와 은희가 자장면을 먹던 ‘자매반점’이 반갑게 자리한다. 촬영은 식당 내부가 아닌 야외 평상에서 이루어졌다. 나란히 마주보고 앉은 영수과 은희. 왼손잡이 영수가 게걸스레 자장면을 먹는 데 반해 은희는 입만 댄 뒤 곧 젓가락질을 멈춘다.

“이집 자장면에서 바퀴벌레가 나오는 설정이었는데 기분 안 나쁘셨어요?”라고 묻자 주인아주머니는 수줍게 웃으며 답한다. “영화는… 그냥 영환디요 뭐.” 이 집의 자장 소스는 달달한 춘장 대신 담백하고 깔끔한 맛을 자랑한다. 함께 주문한 탕수육은 튀김이 바삭하고 기름지지 않아 입에 착착 달라붙는다. 영수와 은희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평상에서 먹는 자장면 한 그릇은 생각보다 훨씬 먹음직스러울 터. 장수군 번암면의 패밀리레스토랑 ‘자매반점’으로 이장님도 동네 일꾼들도 한 가득 차를 타고 모두모두 밀려온다. 그야말로 장수사람들에게는 명동 한복판처럼 흥겨운 공간이다.



#2 곁에 있지만 깨닫지 못하는 ‘파랑새’

영수의 병이 나아갈 즈음 찾아온 옛 애인, 엄밀히 말하면 그 둘의 동화 같은 사랑에 ‘휴대폰’이라는 시간성이 개입되면서 장수는 문명화된다. 평생 사랑하는 사람과 자식 낳고 농사지으며 살 듯 변화된 영수에게 도시의 문명은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예컨대 여행도 그렇다. 저 멀리 제주도와 울릉도를 무위도식하듯 떠나도 문명이 개입되는 순간 환상은 일순간 깨어지곤 했다. 그때 체감하는 ‘후회’라는 감정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뒤늦게 지나간 순간이 ‘행복’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행복은, 잡히지 않는 파랑새처럼 후회의 반복 속에 늘 반 발자국씩 저만치 앞서간다. 마치 눈 오는 겨울 밤, 다시 희망의 집으로 찾아든 영수의 뒷모습처럼.

전북 장수는 가장 행복할 수도, 때에 따라선 가장 불행할 수도 있는 여행지다. 누군가는 자연이 주는 청아함에 더 없는 만족을, 또 누군가는 볼 것 없는 외진 마을에서 불평을 늘어 놓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행복>이 더해진 마을은 단순히 사람 사는 풍경으로만 채워지진 않는다. 한번쯤 삶으로부터 시간성을 벗어던지고 싶다면 이곳을 찾길 권한다. 불온했던 자아에 스스로 ‘행복’이란 화두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 영화가 있어 여행의 여운이 더 깊어지는 공간이다.

전북 장수 글=박나리 기자 nari@traveltimes.co.kr
사진=엄지민 Travie photographer, 스틸제공=영화사 집
취재협조=한국관광공사 02-729-9600 www.visitkore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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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방법
서울에서 88고속도로를 타고 남장수IC를 빠져나온다. 19번 국도를 타고 장수 방면으로 20분 정도 들어가면 번암면이 나온다. 약 4시간 소요. 번암면에서 영화 촬영지를 돌아보는 일은 간단하다. 작은 마을 간판에만 집중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번암면을 중심으로 하동마을, 동화교, 원지지마을이 차 5분 거리에 모여 있으며 그로부터 번암시장까지는 차로 10여 분 거리. 장수보건의료원은 20여 분 거리에 위치한다. 특산물 영화 속에도 등장한 ‘번암막걸리’는 걸죽하고 달달한 맛으로 인기가 높다. 막걸리는 다음날 머리가 아픈 것으로 악명 높은데, 번암막걸리는 숙취가 없어 좋다. 그 밖의 정보 장수군청 홈페이지(www.jangsu.go.kr)를 통해 숙박 및 더 다양한 주변 소식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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