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에 사는 교포 배건재씨는 자기 재산을 따져본 적은 없지만 『1억 달러쯤 될까』하고 웃었다.
겸손한 말끝에 너털웃음이었다.
10여개 사업체를 갖고 미국사회에서 군림하는 인간 배건재. 올해 58세다
사업으로 단련된 몸매, 훤칠한 키에 항상 노넥타이.
그는 미국인들도 우러러보는 거부다.
배건재씨의 사업체로는 3백실 규모의 「래디슨호텔 링컨우드」를 비롯 18홀 짜리 채플힐 골프장, 포스터 뱅크, 케이블 TV, 대형 쇼핑몰2개, 페인트용 부러시와 고급 벽지공장, 무역회사 등 시카고 굴지의 기업들을 갖고 있다.
▲신앙의 힘으로 이룩
이렇게 의욕적으로 사업을 펼쳤기 때문에 그는 소유자산을 다져볼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신용과 성실, 근면으로 미국이란 신용사회에서 거부가 된 배건재씨는 오늘의 자기가 있기까지는「크신 분의 지키심」이 있었다고 강조한다.
고생 끝에 얻은 것은 신앙. 그는 천금보다도 귀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지금도 하루일과 시작을 성경과 기도로 한단다.
이제 그는 소수민족의 홀로서기와 한국을 위해 기여 할 것을 항상 생각하고 있다.
晋州가 고향인 배건재씨의 미국 행 드라마는 이렇다.
서울공대 화공학과 2학년인 1956년 일리노이주 밀리킨대학의 초청을 받아 유학 길에 올랐다.
그때 나이 21살. 2학년을 마친 겨울방학이었나 보다.
여의도비행장에서 프로펠러 여객기에 올랐을 때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고 하니까.
그때 돈 20달러는 청년 배건재의 유학자금 전부였다.
2시간 후 일본 동경에 도착한 그 청년은 팬암으로 갈아타고 머나먼 미국 땅 하와이에 도착.
그리고 그곳에서 1주일을 묵었다.
하와이 체류 1주일은 36년이 지난 지금도 배건재씨에겐 생생하다.
교포할머니 집에 묵으면서 모국에서 온 유학생이라고 극진히 환대 받았던 일들을 잊지 못하고 있다.
▲할머니 온정 못 잊어
캐딜락을 처음 타고 와이키키해변을 구경갔던 때, 겨울옷만 갖고 갔기 때문에 동한복 차림으로 여름해변을 거닐던 그날의 추억들.
그런가 하면 당시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교포들이 욕하는 것을 보고 순간 의아해했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공부는 안하고 외국여자 프란체스카와 사귀어 결혼했다」는 것.
교포 할머니는 『학생은 이박사처럼 정치 좋아하지 말고 특히 여자 멀리하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타일렀다.
모국이 그리웠던 할머니는 학생 배건재를 친아들처럼 보살펴주고 하루 숙박비 5달러, 식대 2달러50센트씩 내야하는 1주일 분을 받지도 않고 떠날 때 되려 5달러를 여비나 하라고 손에 쥐어주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탕으로 만든 긴 목걸이까지 걸어주며 행운을 빌어주던, 그 할머니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하와이에 있는 동안 초청대학의 통보를 받은 배건재는 시카고 행 비행기를 탔다.
그날아침 하와이를 더나 10여 시간 걸려 미드웨이공항에 내려 또다시 종착지인 일리노이주 니켈브 행 쌍발비행기를 2시간 타고 밤10시께 밀리칸대학에 도착, 교무처 사람의 안내를 받아 YMCA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 유학생은 허기졌다. 국내선 비행기에서는 당시만 해도 기내식을 주지 않았다.
점심대가 되자 이 자리 저 자리에서 승객들이 준비해온 샌드위치를 꺼내 먹는 것을 보고 알았다. 아차 했다. 그러니 더욱 배가 고팠다.
호텔에 도착, 허기진 배를 채우려 했으나 호텔은 물론 시내 식당, 식료품 점들 마저 문을 닫아버려 하루종일 맹물 타령이었다.
빈배를 움켜쥐고 이튿날 아침식사를 밤새도록 고대했던 유학생 배건재.
이게 또 웬일인가.
▲허기로 美생활 시작
서울에서 새 식구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밀리칸대 유학생 7명이 날이 새자마자 호텔로 찾아와 자기를 데리고 교회로 가는 바람에 아침까지 걸러야만 했단다.
배건재씨는 그때를 회상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으레 첫인사가『식사 하셨습니까』라고 하는 말이 얼마나 생각났는지 모른다고 했다.
교회에서의 예배는 오후 1시에 끝났으나 유학생들은 한국소식을 듣고 싶다고 또 붙들어 결국 점심도 못 먹고 저녁시간이 되어서야 그중 한 유학생의 아파트로 가 겨우 샌드위치와 우유로 배를 채울 수 있었다.
YMCA호텔에서 이틀을 묵은 그는 학교 기숙사로 들어가 마침내 꿈같은 유학생활을 시작.
호텔 숙박료 5달러는 하와이할머니가 준 돈으로 지불했다.
기숙사에서는 한기 75센트 하는 식사 값을 아끼기 위해 아침은 건너뛰고 점심은 우유 한잔, 그리고 저년만 먹는 생활을 한달 간 계속했다.
그러나 가지고 갔던 20달러는 바닥이 났다 .
유학생 배건재는 이때부터 10센트 짜리 쌀 봉지를 사서 밥을 지어 간장과 함께 먹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사탕공장 등을 전전, 시간당 1달러35센트를 받고 하루 17시간 씩 일을 해 학비를 모았고 그 돈으로 3년 반만에 밀리칸대학 화공과를 졸업했다.
배건재씨가 시카고에 정착하게 된 것은 대학 졸업 4개월 후.
그 당시엔 꽤 많은 액수인 3백2O 달러의 의 봉급을 받고 대학이 있는 일리노이주 제약회사에 입사했으나 4개월만에 회사 형편상 해고당했다.
사회에 나와 첫 직장의 흥분도 가시기 전에 그만둬야 했던 그는 무작정 시카고 행 보따리를 둘러맸다.
▲4개월만에 해고
시카고는 미주지역의 곡창. 공업지대로 당시만 해도 직장 얻기가 쉬웠던 곳이었다고 한다.
곧바로 얻은 직장은 식료품 제조회사로 꽤나 큰 「스위프트 컴퍼니」.
배건재씨는 이 회사 실험실 화학사로 들어갔다.
봉급은 인종차별 때문에 미국인 초봉이 4백40달러였으나 10%가 절은 4백 달러를 받았다.
이 회사 실험실에는 석사. 박사 등 3백50명이 있어 황색인종이면서 학사출신인 그는 10개월을 버티다가 조그마한 제약회사로 자리를 또 옮겨야만 했다.
그러나 이 회사에서도 한달 보름만에 권고사직 당했다.
실험실책임자가 급환으로 입원해 대타로 채용됐다가 금새 퇴원하는 바람에 그만둬야 했다.
배건재씨는 그후 베이츠 제약회사, 메디칼 캐미칼스 회사 등을 옮겨다니면서 성실히 일한 대가로 공장장까지 됐다.
그는 이때 결심을 했다. 월급쟁이 생활을 청산하고 독립하기로.
그때가 1973년. 회사 일로 평소 사귀어 오던 미국인 칼슨씨와 손잡고 베이(Bay)제약회사를 설립했다.
베이는 배씨의 미국식 발음으로 본인의 성을 따서 회사이름을 지었다.
jfflq자금 전액을 칼슨씨가 대고 배건재씨는 20%의 주식을 배당 받았다.
이 제약회사는 얼마안가「베이타슨」감기약 전문메이커로 급성장 했다.
「베이타슨」은「베이」라는 배씨 성에 감기약 이라는 「타슨」을 붙여 지은 물약.
코페인이 함유 안 된 이 감기약은 미국인들에게 대단한 반응을 나타내 자리 굳히면서 배건재씨는 중소기업 육성자금융자를 받아 칼슨씨와 동업체제에서 독립했다.
독립회사를 차린 그는 이즈음 숙명여대 약대 출신인 옥명화씨와 가정을 이룬다. 약쟁이가 약사 부인을 얻은 것이다.
한국말. 한국인의 지혜로 아이디어를 짜내니 제약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그에게는 금상첨화였다.
이들 부부는 한국요리전문식당, 건강식품점 등을 닥치는 대로 인수, 사업의욕을 극대화시켜 나갔다.
▲대형제약사로 도약
그때 마침, 생각지 않던 행운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계적인 독일제약회사인「바이엘」이 미국시장에 진출하면서다.
그들의 제품 중 바이엘의 약자인「Bay」상품 붙은 약품이 미국시장에 널려있어 베이제약회사 이름을 사겠다는 것이었다.
협상 끝에 1백만달러를 현찰로 받아 쥐고 상호를 넘겼다.
행운을 걸머 쥔 배건재씨는『조상이 주신 성씨 하나로 1백만달러를 단번에 손에 쥐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그리고 베이제약회사를「My-K」제약회사로 이름을 고쳤다.
부인 이름 명화(MyungHwa)에서「My」를 따고 자기 이름 건재의「K」이니셜을 따낸 것이다.
생각지도 않던 돈 1백만 달러를 고스란히 재투자, 기존 제약회사의 3배 크기로 확장, 감기약 전문에서 1백45종류의 각종 약품을 제조 판매하는 대형 제약회사로 일약 탈바꿈했다.
미 국방성에 연간 3백만 점에 달하는 약품을 납품하고 있을 때 그는 한국의 오산 미군기지를 방문, 자기가 만들어낸 약품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감개무량해 하기도 했다.
그러나 군납할 때 빚어진 하나의 촌극은 평소 친분이 있고 도움을 받아왔던 사람에게 한국식으로 얼마간의 성의표시를 했던 것이 말썽이 돼 연방법을 어긴 죄인 아닌 죄인이 되기도 했다.
「마이-케이」제약회사가 날로 번창해 가고 있을 때 네덜란드의 AKZO라는 유명 재벌회사가 인수하겠다고 덤벼 배건재씨는 온갖 정력을 쏟아 부은 제약회사였지만 팔아 넘겼다.
▲한국인엔 할인혜택
매도액에 대해서는 그가 밝히지 않았지만 세금으로 1천5백만달러를 냈다고 하니 엄청난 액수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뒤 배건재씨는 자본금 3백만 달러의 포스터뱅크를 개점, 지난 89년 말 6백만 달러를 투입, 6백18평의 은행 건물을 신축했고 무역회사를 차려 중국. 캐나다. 이탈리아. 한국 등지에서 고급벽지와 페인트용 부러시를 수입하고 있다.
그는 또 TV와 방송국 2개, 90년에는 골프장, 2개의 쇼핑몰을 사들여 기업을 확장하면서 지난해 10월1일에는 세계유명 체인인 하얏트리젠시호텔을 현찰 1천만달러에 인수, 래디슨호텔로 체인을 바꿨다.
시카고의 거부, 배건재씨. 이제는 모국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싶어한다.
미국에 온 한국 여행객들에게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쉬어 갈 곳을 찾아주기 위해 호텔을 인수한지도 모른다.
방 값은 40%를 디스카운트해주겠다고.
주말이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가족과 함께 보내는 배건재 회장은 포스터뱅크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부인 옥명화씨와 성칠군(13), 숙희양(11) 두 자녀와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김병태 국장>
♤배건재씨가 지난해 현찰 1천만달러로 사들여 경영하고 있는 「래디슨 호텔 링컨우드」는 시카고 시내를 기고 지나는 I-94도로 주변에 위치.
지하1층, 지상7층, 3백 개의 객실을 갖추고 6백 명까지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대.소연회실 2O개, 고급식당, 실.내외수영장, 사우나, 오락 및 운동시설 등 다양한 부대 업장이 있다.
미국 중. 서부지역에서는 유일하게 한국인이 주인인 이 특급호텔은「오 헤어」국제공항과는 8마일, 다운타운과도 역시 8마일, 자동차로 각각 15분 여 걸리는 거리에 있어 한국인은 물론 외래객들의 이용이 많고 주말이면 가족단위 미국인 여행객으로 붐빈다.
특히 호텔에서 5분 거리에 있는 한국인타운에는 한식. 중식. 일식 등 동양식당이 집결해 있어 한국총영사관, 무역관, 관광공사, 한국계은행, 한국상사들이 고객이다.
또 지난 4월부터 주3회 운항으로 증편된 대한항공 승무원들도 이 호텔에 묵고 있다.
객실요금은 싱글 1백2달러, 더블 1백24달러로 10실 이상 사용할 때는 단체요금을 적용, 70~79달러를 받고 있다.
배회장은 그러나 한국에서 온 손님일 경우 요금을 대폭 할인해 주겠다고 한다.
이 호텔은 30여년 간 하얏트체인으로 운영돼 왔으나 배회장이 인수한 후 세계 3백여 개 유수 호텔을 경영하고 있는 래디슨으로 바꿔 주변의 건물 및 대지를 사들여 호텔직영 쇼핑몰, 한식당 등 업장을 확장하고 있다.
한편 이 호텔의 경영책임은 부사장 격으로 교포성악가 김성자씨(49)를 스카우트해 맡기고 있는 김여사는 67년 이화여대를 나와 시카고에 유학, 현재 호텔 일을 보면서 한인회 여성회장을 맡고 있다.
김여사는 호텔 인수와 함께 지난 1월께 서울에 와 여행사 등을 방문, 래디슨호텔을 판촉하고 돌아갔는데 서울사무소 개설 등을 위해 8월께 다시 서울에와 적극적인 판촉을 펴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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