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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성(聖)과 속(俗)이 살아 숨쉬는 땅이다. 힌두의 숱한 신에서부터 부처, 알라까지. 실제 인도는 그들의 성스러운 기운으로 충만하다. 하지만 여행자들의 눈에 인도는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우며, 더러운 俗의 땅에 가까워 가끔은 귀를 막고 또 가끔은 눈을 가리며 ‘인도는 인도’일 뿐이라 되뇌게 한다. 성과 속의 경계가 무의미해 보이고, 우습게 여겨질 즈음 인도 땅 곳곳에 자리한 세계문화유산을 돌아본다. 그들의 역사와 종교는 기나긴 세월 속에 철심처럼 굳게 박혀 있다. 역시 ‘인도는 인도’였다.

인도 글·사진=Travie writer 이진경, 취재협조=인도정부관광청 www.indiatourism.or.kr

■7박8일 인도 중북부 세계문화유산 코스

1일 21:00 델리 도착
2일 델리 자미 마스지드, 인디아 게이트
18:30 델리 출발, 19:40 보팔 도착(비행기)
3일 빔베트카 바위그늘 유적
4일 산치 불교 기념물군
14:50 보팔 출발, 17:50 잔시 도착(기차), 18:20 오르차 도착
5일 오르차 라즈 마할, 쉬시 마할, 제항기르 마할
13:00 오르차 출발, 17:00 카주라호 도착(버스)
6일 카주라호
12:00 카주라호 출발, 17:00 잔시 도착(버스),
17:50 잔시 출발, 20:25 아그라 도착(기차)
7일 아그라 타지마할, 아그라 성
16:00 아그라 출발, 22:30 델리 도착(버스)
8일 03:30 델리 출발, 16:30 인천 도착


Madhya Pradesh 마드야 쁘라데쉬
세계문화유산의 보고


지난 7박8일간의 인도 여정을 지도 위에 그린다. 델리에서 출발해 보팔, 산치, 잔시, 오르차, 카주라호, 아그라를 지나 다시 델리로 이어진 여정은 인도 지도의 중북부에 삼각형 형태로 그려진다. 여정의 처음과 끝을 장식했던 델리와 아그라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일정은 마드야 쁘라데쉬(Madhya Pradesh)에서 보낸 셈이다. 마드야 쁘라데쉬. 인도로 떠나는 이들이 교통편 등 여러 이유로 조금은 꺼리는 지역이다. 특히 7일 정도의 짧은 일정으로 인도를 찾는 이들은 골든 트라이앵글이라 불리는 델리, 아그라, 자이뿌르 코스를 택하는 경우가 많아 마드야 쁘라데쉬는 근처도 얼씬거리지 않는다. 한 달 정도 여유를 갖고 여행하는 이들이라면 모르겠다, 카주라호 정도는 들를지. 충청도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래서 인도 여행 전문가들은 이 지역을 한국의 충청도, 그것도 여행자들의 발길이 덜한 내륙의 충청도에 비유한다. 한데 이 지역에 인도에 자리한 26개의 세계문화유산 중 세 개가 몰려 있다.

■인류가 만들어 낸 세월의 흔적
빔베트카 바위그늘 유적
Rock Shelters of Bhimbetka

지금으로부터 50만년 전, 인류의 존재가 의심되는 시기에 빔베트카에 살던 누군가는 바위에 그림을 그렸다. 선조의 바통을 이어받은 후손 또한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BC 50만년 전부터 BC 9,000년까지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계속됐다. 빔베트카에 자리한 750개의 바위 중 500여 개의 바위에는 그들의 그림이 있다. 세월이, 역사가 된 그림은 제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1957년에야 비로소 발견돼 200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사정이 이러하니 빔베트카에서 세월을 숫자로 매기는 일은 참으로 부질없다. 2008년 오늘, 길어야 100년을 사는 우리가 수십, 수백 번의 환생을 거듭해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빔베트카에는 고스란히 녹아 있다.

보팔에서 46km. 보팔과 빔베트카를 잇는 평원에 가까운 길에서는 눈과 마음이 시원해진다. 이 길을 차로 1시간30분 가량 달리면 드문드문 기괴한 형태의 바위들이 출몰한다. 빔베트카가 가까워진 것이다. 본격적인 빔베트카 여정은 커다란 사암 바위 입구에서 시작된다. ‘붉은 도시’라 불리는 요르단의 페트라만큼은 아니지만 분위기는 비슷하다. 페트라의 시크처럼 빔베트카의 바위도 분홍 햇살을 머금었다.

아마 무른 성질을 지닌 사암으로 이뤄진 이곳 지형이 지금의 빔베트카를 존재하게 했을 것이다. 돌멩이로 적당히 슥슥 파내기만 해도 작품이 완성됐을 테니. 연필 혹은 붓 대신 사용한 그림의 도구는 알 수가 없다. ‘바이 핸드(by hand)’라 말하는 가이드의 표현을 빌릴 뿐이다. 작품의 주제는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사슴, 소, 말 등 동물 그림이 주를 이루며, 춤을 추는 무희나 군사의 모습도 볼 수 있다. 특별히 물감을 사용하진 않았겠지만 바위에 따라 그림은 희거나 붉다. 유적들은 숲길을 따라 군데군데 자리했다. 750여 개의 바위 중 500여 개의 바위에 그림이 그려져 있지만 여행자들이 둘러보는 유적들은 십여 개로 정해져 있다. 안내판을 따라 길을 이으면 1~2시간 만에 모든 곳을 돌아보게 된다.



■ 인도 땅에 가득했던 불심을 찾아
산치 불교 기념물군
Buddhist Monuments at Sanchi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힌두교를 믿고, 나머지 20%가 안 되는 인구의 반 이상이 이슬람교를 신봉하지만 불교가 탄생된 곳은 엄연히 인도 땅이다. 인도인들의 삶 속에서 불교의 향취를 느끼기는 어려워도 인도 땅 곳곳에 불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산치도 그런 곳이다. 불교 성지로 꼽히는 인도의 기타 지역들처럼 부처의 일생과 관련이 있는 지역은 아닐지언정 불심이 인도 땅을 떠돌던 당시 조성된 불교의 흔적인 것이다.

산치는 BC 3세기경 아쇼카 대왕이 불탑을 세운 후 1,400여 년이 지난 11세기까지 조성됐다. 꾸준한 노력도 무용지물. 인도인들의 머릿속에서 불교가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이곳도 자연스레 사라지는 듯했다. 산치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영국의 지배가 시작되면서다. 영국 지배가 확정되기 전인 1818년에 발견돼 1912년 영국의 고고학팀이 본격적으로 발굴과 복원을 시작했고, 198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보팔에서 40km. 1시간30분 가량 길을 달려온 산치에서 가장 먼저 여행자들을 맞는 건 메인 게이트 앞의 보리수 나무다. 실제 이 나무는 1952년에 인도와 스리랑카의 수상이 보드가야의 보리수 나무 가지를 옮겨 심어 놓은 것이라 한다. 부처가 성도한 보드가야의 기운에 더해 산치의 불심을 먹고 자란 덕인지, 짧다면 짧은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나무는 크게 자랐다.

보리수 나무를 지나 메인 게이트로 들어서면 산치 불교 기념물군은 대부분 한눈에 들어온다. 한가운데에 당당하게 자리한 돔 형태의 탑이 산치 유적의 핵심인 제1 스투파(No.1 Stupa)다. 스투파 사방으로는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문(토라나, Torana)이 자리했다. 벽돌을 쌓아 만든 전탑 형식의 스투파가 밋밋하다면 각각의 스토리로 화려하게 장식된 토라나는 산치 불교 기념물군의 진짜 볼거리라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지어진 남쪽 토라나에는 부처의 어머니인 마야 부인이 새겨져 있다. 부처는 연꽃으로 표현돼 있다. 참고로 제1 스투파 토라나에서 부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하지 말라는 명령에 초기 불교가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불상은 토라나에서 들어가 탑 사방에 놓여 있지만 이마저도 이슬람의 문화 파괴로 하나의 불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얼굴이 뭉개진 상태다. 그 밖에 북쪽 토라나에는 원숭이에게 꿀을 공양받는 재미있는 부조가 있다. 정교하게 새겨진 부조들은 하나하나 의미를 담고 있어 가이드 없이 관람한다면 그 의미를 놓치기 십상이다. 산치의 불교 기념물군은 10분 이내의 거리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 글을 몰라도 읽을 수 있는 성애의 교과서
카주라호 기념물군
Khajuraho Group of Monuments

마드야 쁘라데쉬에서 한국인들의 발길이 가장 잦은 지역을 꼽으라면 단연 카주라호다. 1~2월, 한국인들의 인도 여행 성수기가 되면 서부 기념물군 앞의 작은 여행자 거리에는 인도인들보다 더 많은 한국인들이 오간다고 한다. 왜일까? 아는 사람은 이미 알겠지만 카주라호 유적지는 에로틱한 조각인 미투나(Mithuna)로 유명하다. 성애(性愛)의 경전인 <카마수트라>를 조각해 널리 성 지식을 전파했던, 조각으로 보는 교과서라고나 할까. 호기심 많은, 혹은 성애에 억압당했던 한국인들은 불편한 교통편을 감수하고서라도 카주라호에 들른다는 거다.

끈질기게 붙어 다니며 호객을 하는 카주라호 장사꾼들의 첫 번째 덕목도 그래서 한국어가 된 것처럼 보인다. “내 가게에 와서 구경해. 안 사도 돼.” “나도 너랑 똑같은 카메라 갖고 있어. 들어와. 보여 줄게.” 부드럽게 시작하지만 결과가 좋지 못한 경우도 있다. 명함을 뺏는다거나 “다음에 만나면 뽀뽀해 줘” 같은 말을 듣는다거나. 민수, 원빈 등 한국 이름을 가진 장사꾼들도 있다. 20대 초반의 민수는 한국인 여행자 전용 방명록을 자랑스레 꺼내 놓았다. ‘인도 사람은 믿을 수 없었는데 민수를 만나게 된 후 생각이 바뀌었다’ 류의 칭찬 일색의 글들이 방명록에 가득하다. 다른 장사꾼들처럼 심하게 사기는 치지 않는다는 민수는 그동안 받았던 유명인들의 명함이며 사진을 보여 줬다. 그리고 한국에서 요가를 가르치는 친한 누나를 만나러 조만간 한국에 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럼 민수도 요가 잘 하겠네. 한번 보여 줘.” 민수가 답했다. “밤에는 요가 안 해. 밤에는 카마수트라 요가만 해.” 아, 여기는 카주라호였지. 헛웃음이 나왔다.

마하트마 간디는 카주라호를 두고 ‘다 부숴 버리고 싶다’고 했다. 너무나 관능적이어서 한편 변태적인 카주라호를 간디는 경멸했던 것일까? 만약 그랬다면 그는 정말 보는 눈이 없는 사람이다. 에로틱 운운하지 않아도 카주라호는 아름답다. 건축과 조각이 완벽한 균형을 이룬 건축물로 평가받는 카주라호는 1986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유적군은 크게 서부와 동부, 남부로 나뉘는데 매혹적인 조각상들은 서부 사원군에 몰려 있다. 동부 사원은 힌두 사원과 자인교 사원으로 단아하게 꾸며진 편. 시간이 여유롭지 않은 여행자들은 이 두 사원군만 보고 길을 재촉한다.

비슈누에게 헌정된 락쉬마나 사원(Lakshmana Mandir)은 서부 사원군에서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편이다. 천상의 그것을 떠올리게 하는 압사라의 춤사위, 힘찬 군대의 행진 등 이곳의 조각은 금방이라도 살아서 튀어나올 듯 섬세하다. 사원의 기단 부분에는 성교 조각이 많다. 그중 사원의 왼쪽 기단 부분에 자리한 ‘말과 성교를 하는 남자와 이를 지켜보는 여자’의 부조는 충격적이다. 가이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강한 남자입니다.”

락쉬마나 사원에서 길을 이으면 바로 나타나는 칸다리야 마하데브 사원은 독특한 체위의 성교 조각으로 유명하다. 요가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체위의 성교를 위해 두 명의 도우미를 둔 조각도 있다. 배움의 길은 끝이 없다더니. 글을 몰라도 알 수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가르침이지만 과연 배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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