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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이 지난 3월1일 창사 40주년을 맞았다.
지난 1969년 3월1일, 민간항공사로 대한항공이 공식 출범한 이래 밟아온 대한항공의 발자취는 한국 민항사와 궤를 함께 하고 있으며, 한국의 경제 및 외교 발전과도 맥을 함께 하고 있다. 민항 대한항공의 태동과정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한항공의 40년사를 간략하게 짚어봤다.
<편집자주>

항공기 130대 보유, 전세계 38개국 103개 도시 취항, 세계 화물 수송 4년 연속 1위, 여객 수송 17위, 연간 매출액 10조원 돌파, 항공동맹체 스카이팀(SkyTeam)의 주도적 항공사…. 2009년 3월1일 창사 40주년을 맞은 대한항공의 화려한 성적표다.

그러나 40년 전 출범 당시의 상황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구형 프로펠러기 7대와 제트기 1대로 출범한 민항 대한항공은 1969년 출범 당시 매출액은 17억원에 불과했고 취항노선도 일본 노선 3개에 불과했다. 40년만에 매출액 6000배 이상의 성장을 이루고 세계의 대표적인 항공사로 자리 잡는 데까지는 40년 동안의 집념과 끊임없는 혁신이 밑바탕이 됐다.





■험난하고 초라했던 시작

“결과만 예측하고 사업을 시작한다거나, 이익만을 생각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업은 진정한 의미의 사업이 아니다. 만인에게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사업이라면 만 가지 어려움과 싸워나가면서 키우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고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1960년대 말, 정부는 국영 기업의 민영화 방침에 따라 항공운송 산업 부문에도 민영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당시 국영 ‘대한항공공사’는 누적 적자만 27억원, 아시아 지역 11개 항공사 가운데 꼴찌였다. 노후된 항공기 8대는 잦은 고장과 결항, 연착으로 공신력도 형편없었다. 회생이 불투명했던 국영 항공사의 인수에 선뜻 나서는 기업은 없었다.

운송업에 뛰어들면서부터 항공사업에도 관심을 두고 있었던 고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에게도 역시 어려운 결정이었다. 임직원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던 게 사실. 그러나 당시 조중훈 회장은 “대한항공공사 인수는 국익과 공익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소명”이라며 만성적자에 허덕이던 공기업 인수를 반대했던 임직원들을 설득하고 인수를 추진했다.

1969년 3월1일, 민영 대한항공이 드디어 출범했고 한국의 40년 민항역사도 시작됐다. 물론 시작은 험난했다. 대한항공은 부실 경영 시스템을 개선하고 조기 정상화를 위한 기반 조성 작업에 착수했으며,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힘을 쏟았다. 직원들을 위한 교육 체계 확립 노력은 현재의 지식경영을 이루는 초석이 됐으며, 대형 제트기 도입 등 과감한 투자를 빼놓지 않았다. 동시에 국제선 항로 확보 작업에 착수하는 등 국제 경쟁력 강화에 역량을 결집했다.

■국제적 네트워크 구축

출범 이후 대한항공은 서서히 국적 항공사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민영화 이후 대한항공이 가장 먼저 개설한 노선은 1969년 10월 취항한 서울-오사카-타이페이-홍콩-사이공-방콕 노선. 당시 동남아 최장노선으로 베트남에 파병, 군사 지원을 하고 있던 건설 및 용역업체들의 재건 사업을 지원하는 효과도 안겼다.

1971년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화물기를 취항한 데 이어 이듬해 서울-도쿄-호놀룰루- LA 태평양 횡단 정기 여객노선을 취항함으로써 본격적으로 국제적인 항공사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대한항공 여객편이 처음 하와이 호놀룰루공항에 바퀴를 내린 1972년 4월19일에는 현지 교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그만큼 해외교류가 드물었던 1970년대 태극마크가 그려진 국적기는 국력의 표상이었으며, 대한항공이 취항하는 외국 중심도시에는 자연스럽게 한인타운이 형성됐다.

서울-LA 노선 개설 이후 1973년 10월에는 서울-파리 노선에도 화물기가 취항했으며, 1975년 3월에는 서울-파리 여객 노선도 개설돼 유럽노선 진출과 함께 글로벌 노선망 구축도 본격화됐다.

대한항공의 글로벌 노선망 구축은 한국 경제의 성장발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중동노선에도 진출해 한국기업들이 성장을 지원했기 때문. 대한항공은 1975년 말 부정기편 운항 경험을 바탕으로 바레인 정부로부터 정기편과 부정기편의 임시 운항 허가를 취득한 데 이어 1977년에는 중동 최대의 산유국이자 최대 항공시장이었던 사우디아라비아에 정기노선을 개설하는 성과를 이뤘다. 이로써 1980년대 초반까지 중동노선 특수를 이어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에도 1986년 서울-뉴욕 노선 개설, 1988년 서울-런던 노선 개설, 1990년 서울-시드니 노선 개설 등을 통해 대한항공은 5대양 6대주에 차례로 취항하는 글로벌 항공사로서의 입지를 강화했다.

■88 서울올림픽 통해 세계무대로 비상

대한항공이 세계 유수의 항공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형 항공사로 발돋움하는 데는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또한 이 시기는 국내 기업들의 적극적인 해외진출과 국내 경제발전으로 국제 항공 노선망을 대폭 확대할 수 있는 기회로도 작용했다.

대한항공은 1980년대 초반 서울과 프랑크푸르트, 바그다드, 싱가포르, 쿠알라룸푸르를 잇는 여객노선을 차례로 개설했다. 기업들의 해외진출 확대에 따라 늘어나는 항공 화물수출 수요에 맞춰 화물노선도 대폭 확충했다. 1980년 서울-프랑크푸르트 화물노선을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1982년에는 싱가포르, 1984년에는 쿠알라룸푸르 노선이 열렸다. 1981년과 1983년에는 각각 LA공항과 뉴욕 JFK공항에 대한항공 전용 화물터미널을 준공, 지금의 항공화물수송 연속 4년 세계 1위를 달성하는 초석이 됐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는 서울-런던, 서울-밴쿠버-토론토 여객 노선이 추가됐고, 1989년에는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이뤄짐에 따라 노선망은 더욱 확대됐다. 1989년 대한항공은 서울-도쿄-LA, 서울-삿포로, 서울-싱가포르-자카르타, 서울-사이판-괌, 서울-마닐라 등의 노선을 연이어 개설, 여객사업의 수익을 높이는 효자 노선으로 육성했다.

■철의 장막, 죽의 장막도 넘어

대한항공은 사회주의 국가로도 적극적으로 향했다. 1980년대 후반 구소련 연방의 해체에 따른 이른바 ‘철의 장막’이 사라진 것에 맞춰 모스크바 노선(1990년)과 블라디보스토크 노선(1994년)을 개설하며 구 공산권 국가로도 노선망을 확대해나갔다.

그러나 중국의 ‘죽의 장막’을 넘는 것은 당초 예상보다 쉽지 않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 기간에 중국을 방문해 중국 민항총국에 전세기 운항허가 취득을 도와줄 것을 요청, 이듬해인 1989년 봄에 중국정부로부터 한국 항공사의 전세기 운항과 단계적인 확대에 대한 확약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중국은 좀처럼 하늘 길을 쉽게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

그러나 지속적인 외교적 노력과 투자를 통해 마침내 1994년 죽의 장막으로 불리던 중국 베이징 노선에 취항했으며, 텐진(천진)과 선양(심양) 등에도 정기편을 취항시키는 등 세계 최대 관광시장으로 부상한 중국시장의 공략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서울 뿐만 아니라 국내 주요 지방도시에서 해외를 직접 연결하는 국제노선을 개설하기 시작했다. 1995년 부산-괌 노선에 취항한 것을 시작으로 대구-오사카, 부산-상하이 노선 등이 잇따라 개설됐다.

■거침없는 글로벌 입지 강화

대한항공은 2000년 6월 국제항공동맹체인 ‘스카이팀(SkyTeam)’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국제적 항공사로의 입지를 다시 한 번 강화했다. 스카이팀의 초기 참여 회원사는 대한항공을 비롯해 델타항공, 에어프랑스, 아에로 멕시코의 4개 항공사. 스카이팀 이후 지속적인 회원사 확충과 공조체제 강화를 통해 현재는 전세계 11개 회원항공사와 3개 준회원사가 가입한 동맹체로 성장했다. 스카이팀 참여를 통해 대한항공은 회원사와의 공동 마케팅을 통한 브랜드 이미지 강화, 노선망 확대 및 고객 편의 제고 등의 효과를 꾀하고 있다.

■2019년 세계 톱10 항공사

물론 민항 40년 역사 동안 많은 위기도 있었다. 1973년 제 1차 석유파동 때는 유가가 4배 이상 폭등하면서 대한항공은 당시로서는 치명적인 약 80억의 순손실을 기록하는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대한항공은 오히려 서울-파리 노선 개설, 미주 여객편 증편, 화물전용 점보기 도입 등 과감한 투자와 경영합리화를 전개, 2년 만인 1975년 흑자로 전환하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1979년 제2차 석유파동과 1980년대 들어 미국이 시행한 항공자유화 정책, 그리고 1997년 말 IMF 외환위기 등이 지속됐지만 위축되지 않고 환경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왔다.
2000년대 들어서도 미국 9.11테러 사건과 사스(SARS) 등에 이어 지난해 고유가 위기까지 숱한 위기 상황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최근의 전세계적인 경기침체와 고환율 위기는 또 하나의 극복해야할 위기로 부상했다. 항공수요 감소로 세계 각국 항공사들이 구조조정에 나서는 등 항공업계에도 위기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대한항공은 올해 투자 목표를 전년 대비 50%나 늘어난 약 8700억원으로 늘려 잡았다. 에어버스사의 초대형 A380 차세대 항공기 2대를 추가 도입하기로 했으며, 장기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 톈진화물터미널 건설 투자, B787 /A350 차세대 항공기 부품제작사업 등에도 투자를 확대하기로 했다. 올해부터는 신규 도입하는 항공기에 세계 최정상급의 명품 좌석을 장착해 서비스할 예정이다. 또 비자면제 프로그램 발효로 수요증가가 예상되는 미국행 공급편도 지속적으로 늘리는 동시에 유럽과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CIS 지역 등에 대한 노선망 확대에도 나설 예정이다.

최첨단 항공기 및 기내 설비 업그레이드, 글로벌 시장 확대 등을 통해 오는 2019년까지 세계 ‘글로벌 톱10 항공사’로 성장하겠다는 게 대한항공의 장기 발전 목표다.



김선주 기자


★대한항공 취항지 CF 파급효과 톡톡

-항공사 자랑 아닌 여행지 소개
-여행심리 자극으로 시장 확대

대한항공의 영향력은 CF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대한항공이 시리즈로 내보내고 있는 취항지 안내 CF는 촬영지마다 여행시장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항공사가 아닌 목적지에 무게를 둔 대한항공의 광고는 단순히 대한항공 자랑 차원을 넘어 잠재된 여행 심리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광고 시작 전부터 여행업계의 관심을 모으곤 한다.

여행사 직원들은 대한항공의 광고에 자신의 담당 지역이 노출될 경우 소비자 문의 증가 등 판매에 큰 도움을 받는다. 2004년 대한항공이 방영한 상하이나 프라하 등은 실제로 여행수요 증가에도 큰 기여를 했다. 이밖에 출연 모델들에게는 스타로 가는 등용문으로 통하기도 한다. 과거 대한항공 CF 모델로 활약했던 윤정희(상하이 편?2004년), 고주원(프라하 편·2004년), 김원경(유니폼 편·2005년) 등은 이후 화려하게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스타의 길을 걷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지난해 무비자 체결 이후 최근 이어지고 있는 대한항공의 미주 CF도 마찬가지. 실제로 젊은이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만든 미주CF가 인기를 끌면서 대한항공 여행정보사이트(travel.koreanair.com)를 찾는 네티즌들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대한항공이 지난 2008년 7월 오픈한 여행 전문 포털 여행정보사이트는 지난해 11월 미주CF 론칭 이후 미주 여행에 대한 네티즌들의 관심이 늘어나면서 1일 평균 방문자가 6600명으로 평소 대비 6배 이상 늘어났다.

이같은 여행정보사이트의 인기는 ‘로드트립 USA’의 역할이 크다. ‘로드트립 USA’ 1일 평균 방문자는 3500여 명으로 전체 여행정보사이트 6600여 명의 53%에 달한다. 대한항공이 미주 CF 상영과 동시에 여행정보사이트 내 개설한 ‘로드트립USA’ 코너에는 TV로 방영되지 않은 CF 동영상 35편을 비롯해 미니가이드북과 뮤직비디오, PC바탕화면, 화면보호기, 해당 도시를 여행한 네티즌들의 생생한 여행기와 사진 등 흥미로운 콘텐츠가 듬뿍 담겨 있어 미국 여행의 ‘보물창고’로 꼽히고 있다.

한편, 대한항공 미주CF는 지난 1월25일까지 한효주의 ‘동부편’에 이어 하석진이 뉴올리언즈, 댈러스, 멤피스, 내슈빌, 시카고 등 중부지역을 여행한 ‘중부편’이 방영되고 있다. 또한 탤런트 이완이 한니발, 와메고, 산타페, 피닉스,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 서부지역을 여행한 ‘서부편’은 오는 3월 말 방송될 예정이다.

김기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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