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년보다 벚꽃이 빨리 핀다는 소식에 마음이 급해졌다.
언젠가 여의도와 여수, 진해의 벚꽃을 섭렵한 뒤, 하동의 벚꽃을 보겠다며 먼 길을 나섰건만 때를 잘못 맞춘 탓에 앙상하게 마른 가지만 보고 온 탓이다. 올해는 섬진강 푸른 물에 벚꽃잎 넘실대는 풍경을 볼 수 있을 것인가. 떠나는 마음에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전남 하동 글·사진=이민희 기자 dumpling@traveltimes.co.kr

■꽃비 내리는 풍경

봄꽃은 항상 아쉽다. 기나긴 겨우내 느껴 온 갈증과 메마름을 해소하기엔 이들의 ‘봄날’이 너무도 짧은 까닭이다. 봄이 왔음을 느끼고, 마음이 설레고, 떠날 채비를 하고 나면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기 십상. 또 다시 일 년이라는 기다림에 빠지고 싶지 않다면 서둘러 시동부터 걸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면, 섬진강 굽이치는 하동으로 떠날 일이다.

이맘때의 하동은 어디를 가나 벚꽃이 지천이다. 푸른 하늘에 때 아닌 하얀 눈이 소복하고, 여기에 바람이라도 불어 준다면 순식간에 내리는 꽃비가 눈앞을 어지른다. 특히 쌍계사 입구인 화개장터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십리벚꽃길은 우리나라 최고의 봄맞이 명소라 칭해도 아깝지 않을 그림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강변을 따라 좁다랗게 이어진 1차선 도로에 빽빽하게 들어앉은 벚꽃이 하늘을 가릴 지경이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두 손을 꼭 잡고 걸으면 백년해로 한다고 하여 일명 ‘혼례길’이라는 애칭이 붙기도 했다고. 그래서일까, 봄만 되면 가족은 물론 앳된 얼굴의 청춘들로 북적인다. 두 손을 맞잡고 때로는 속삭이는 모습이 꽃보다 더 아름답다.

하동의 벚꽃을 노래하기 앞서 먼저 보아야 할 것이 있다면 단연 섬진강이다. 바다와 조우하는 광양만에서 시작해 하동으로 거슬러 오르면 하동송림 부근에서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구례와 하동으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다와 조우하기 전, 화개장터 부근에서 화개천의 잔물결을 보듬은 섬진강은 이전보다 풍만한 수량과 너른 강폭으로 대지를 적신다.

양 옆으로 솟은 지리산의 위세와는 다르게 그저 길이 이끄는 대로 묵묵히 흐르는 모습이 포근하다. 여기에 구례와 하동에서 피워낸 벚꽃이 옥색 물빛에 흐드러지면 ‘꽃이 피고 나비가 넘노는’ 그야말로 남도의 봄이 절정에 달하니, 이를 보고 싶다면 매년 열리는 화개장터 벚꽃축제 기간을 이용해도 좋겠다. 올해로 17회를 맞은 화개장터 벚꽃축제는 4월3일부터 5일까지 3일간, 하동군 화개면 차문화센터 일원에서 펼쳐진다.




■고즈넉한 산사의 봄

이제 막 겨울잠에서 깨어난 화개장터는 봄바람 따라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한적한 시골장의 모습이지만 벚꽃 만발한 이맘때면 ‘윗마을 구례사람 아랫마을 하동사람 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쳐’ 추억과 향수를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 국밥, 도토리묵, 재첩국, 산나물 등으로 배를 채운 뒤 쌍계사까지의 십리 여정을 시작해 보자.

쌍계사로 이르는 길은 언제 걸어도 평온하다. 길게 뻗은 전나무가 청명함을 더하고 쌍계(雙溪)와 석문(石門)이라 새겨진 두 개의 바위가 듬직하다. 이 바위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지팡이 끝으로 쓴 글씨라는 전설이 있으니 한번쯤 눈여겨볼 만하다. 문화재에 관심이 있다면 쌍계사 곳곳을 찬찬히 둘러볼 일이다. 화엄사, 실상사 다음으로 국보와 보물을 많이 간직한 절로, 진감국사 대공탑비(국보 47호), 대웅전(보물 500호), 쌍계사 부도(보물 380호), 팔상전 영산회상도(보물 925호) 외에도 흔히 지나치기 십상인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등 국가지정 문화재로 가득하다.

두 갈래의 계곡이 하나로 만난다는 뜻을 가진 쌍계사의 봄은 유난히 화사하다. 사찰 곳곳을 벚꽃으로 치장한 탓도 있지만 원체 단청이 화려한 색채로 꾸며져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지리산 10경을 품은 천년고찰로서의 은근한 기품을 놓지 않으니 보면 볼수록 새로운 맛에 반할 따름.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석가 진신사리를 봉안한 9층 석탑과 쌍계사의 유래를 설명한 진감선사 대공탑비 등 쌍계사 답사가 끝났다면 내친김에 대웅전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불일폭포 등산에 도전해 보자. 이 역시 지리산 10경의 하나로 쌍계사에서 약 3km 지점에 있어 겨우내 찌뿌드드했던 몸을 깨우기에 좋다.
위치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8
입장료 어른 1,800원, 청소년 700원, 어린이 400원 문의 055-883-1901 www.ssanggyesa.net

■토지의 무대, 최참판댁

소설 권수로 총 21권, 원고지 분량으로 3만1,200장에 달하는 대하소설 <토지>를 읽은 사람은 그 유명세에 비해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럼에도 <토지>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몇 차례 드라마로 만난 경험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우리 민족이 살아온 굴곡진 삶에 있다. 평사리 마을 사람들의 삶과 최참판댁을 중심으로 민족의 한과 강인한 생명력, 이를 표현하기에 지금의 ‘최참판댁’보다 더 적당한 무대는 없어 보인다.

최참판댁은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로 유명한 악양 평사리의 품에 안겨 섬진강이 주는 혜택을 온몸으로 받고 있다. 굳센 모습의 지리산을 등에 업고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을 바라본 작은 마을 악양(岳陽) 평사리. 이곳엔 가녀린 체구에 불 같은 의지를 뿜어내던 서희 아씨와 그런 서희 아씨도 두려워할만큼 신경질적이었던 아버지 최치수 그리고 저마다 가슴 절절한 사연을 품고 살던 수백여 명의 등장인물의 삶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비록 소설 <토지>에 나오는 고택을 재현한 것일지언정 우리에겐 이미 드라마 세트장으로 낯익은 모습이 아니던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지은 최참판댁의 별당과 소설 속 묘사 그대로 꾸민 정원의 조경수는 물론, 조선 후기 우리 민족의 생활 모습을 담은 초가집, 유물 등이 조성되어 있어 드라마를 챙겨보고, 소설을 꼼꼼히 읽은 사람이라면 그 내용과 장면을 떠올리며 걷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아울러 사랑채 대청마루에 앉아 평사리의 넓은 들판과 섬진강을 한눈에 담아 보시길.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야말로 지리산의 핏빛 역사와 평사리 들판의 풍요로움이 맞닿는 공간일지니, 구한말 시대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빼앗긴 땅에 얽힌 민초들의 한과 굽이진 인생사에 가슴이 먹먹해 온다. 허나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섬진강은 오늘도 묵묵히 바다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입장료 어른 1,000원, 청소년 800원, 어린이 600원 문의 하동군청 문화관광과 055-880-2375


"
저작권자 © 여행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