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사람들은 원래 정체를 숨기는 법이다. 어리버리 신문기자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일 줄이야, 바람둥이 자선가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일 줄이야 그 누가 알았으랴. 지구상에는 초능력을 숨긴 영웅이 있다면 업계에는 남다른 끼와 재능을 숨긴 스타가 있다. 어디에 있느냐고? 바로 당신 옆자리에, 가장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도선미 기자 sun@traveltimes.co.kr


■원재성
상해항공 여객 영업부 대리

-개그맨지망생이었던 사나이

상해항공 5주년 기념 기차여행 행사. 어김없이 원재성 대리가 떴다. 요즘 상해항공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바로 이 사람. 순도 100%의 ‘날멘트’에 좌중이 쓰러진다. 친한 친구들 결혼식이나 사내 행사에도 모자라 요즘은 거래 여행사 행사에도 투입돼, 영업하랴 MC보랴 정신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이사람, 어쩌면 일요일 저녁 9시 개콘에서 봐야했을지도 모를 인물이라는 걸.

★어쩌다가 영업사원이 행사전문 MC가 됐나
처음에 입사를 위해 이력서에 특기를 ‘개그’라고 적었다. 개그맨 지망생이었던 전력 때문에 회사에서 ‘재미있는 놈’이라고 부른다. 사내 행사나 동료들 집안 행사 사회를 많이 보다가 요즘에는 입소문이 났는지 외부 여행사 워크숍 같은 데에서도 많이 부르더라. 웬만한 연예인보다 낫다고.

★개그맨 준비는 얼마나 했나
고등학교 때부터 개그맨이 꿈이었고, 학교 축제 사회자도 도맡아 했다. 대학도 연극영화과로 진학할 생각이었는데 낙방해서 결국 관광학과로 선회했다. 대학 2학년 때 처음으로 시험을 쳤고 군제대 직후에도 한번, 그 이후로 두 번 더 시험을 봐서 총 4번이었다. 하지만 네 번 다 미끄러졌다. KBS 17기 시험 때는 최종 예선 8명까지 올라갔는데 떨어져서 좌절이 컸다. 그때 같이 시험 본 사람이 정형돈, 강유미다.

★시험 볼 때 어떤 개그를 준비했나
주로 원맨쇼와 성대모사였다. 1차 시험 때는 봅슬레이 흉내를 내면서 해설을 했고, 2차 때는 순풍산부인과 미달이와 선우용녀, 박영규의 대화를 1인3역했다. 3차는 개그맨과 애드립 대결인데 이 부분에서 무대울렁증 때문에 잘 못 했던게 패인이었던 것 같다. 저번에 TV를 보니까 봅슬레이 개그가 나오더라. 왠지 내 개그를 빼앗긴 것 같아 분했다.(웃음)

★아예 포기한건가. 개그 욕심이 쉽게 사라지진 않을 텐데.
지금은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개그맨 시험에 나이제한이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결국 포기하게 되더라. 지금은 상해항공에서 일하면서 가끔 이렇게 행사에서 사회 보는 것을 취미처럼 즐긴다. 하지만 아마추어같이 하진 않는다. 행사시 10번 이상 같은 멘트를 사용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멘트를 개발하려고 애쓴다. 애드립을 쳤을 때 반응도 항상 메모한다.

★유머 감각이 있다는 게 지금 하는 영업에 도움이 많이 되겠다
첫 만남에서 항상 쓰는 멘트가 있다. “제 명함 10장 모아오시면 상해항공 항공권 드립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웃는다. 유머감각은 인맥을 넓히는 데 좋다. 특히 사회자로 무대에 서면 단기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나를 알릴 수 있어 영업력과 세일이 빨라진다.

★원재성에게 개그란?
윤활유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도구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부드럽게 해주는!



■정용재
모두투어 동남아 인센티브팀 대리

-노래하는 투어플래너

실력파 가수들의 등용문이었던 강변가요제 특별상 수상경력(97년), 이승환의 기획사 드림팩토리 1년 소속 가수, 롤러코스터의 베이스 지누의 솔로2집 객원 가수, 모두투어의 동료들과 결성한 디레일드(Derailed)의 실질적인 리더. 하지만 출중한 노래 실력에도 불구하고 데뷔의 꿈은 번번이 좌절됐다. 그래도 포기 하지 않았다. 드디어 2009년, 정 대리는 대망의 첫 디지털싱글앨범 발매한다.

★음반에 대해 좀더 설명해 달라.
아는 형과 함께 듀엣을 만들었다. 아직 밴드 이름은 미정이고, 3곡을 담아서 CD가 아닌 디지털 방식으로 온라인 발매할 예정이다. (그는 ‘발매’라는 표현이 거창하다며 자제해달라고 했다) 앨범 가제는 ‘시즌&리즌’(계절과 이유)이고 직접 작사한 타이틀곡 제목은 ‘비 개인 오후’다. 장르는 포크락에 가까운데 매우 서정적이고 무거운 분위기로 만들 거다. 전무후무한! 3곡씩 담은 디지털 싱글 앨범을 4번 정도 낸 후, 이걸 다시 모아서 정규 앨범으로 만들고 싶다. (‘비 개인 오후’의 한 소절을 부탁했더니 ‘편지’를 부른 가수 김광진을 연상시키는 감미로운 미성이 흘러나왔다. 비 개인 오후 널 바라본 기억/ 처음처럼 선명한, 완전한 느낌/ 멈추지 않아 가득한 사랑/ 남김없이 너에게 주고 싶어/ 내 모든 것)

★왜 갑자기 음반을 낸다는 건가. 회사 일에 소홀할 우려도 있지 않나.
무급휴가 1달 동안 여유시간이 생기다보니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음악을 다시 듣게 됐다.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취미로서 음악을 다시 시작하고 싶더라. 하지만 전업가수를 생각하는 건 아니다. 여행업은 직업으로서 충분히 좋아하고, 욕심도 있다. 이 작업은 단순히 취미로 자기만족을 위해 하는 거다. 오히려 음악 작업 때문에 생활에 활력이 생기다보니 전보다 일도 즐겁다. 행복하다.

★어느 정도 진척됐는지?
일을 벌인지는 한 달 반 정도 됐는데 아직 ‘미토콘드리아’, ‘아메바’ 단계다. 다세포가 되면 체형을 바꿀 수 없으니까 단세포 때 컨셉을 잡느라 고민이 많다.(웃음) 기획사도 없고 자비로 하는 거라서 생기는 어려움도 크다. 현재 곡이 하나 완성 되서 녹음 단계에 있는데 녹음실 기사랑 문제가 생겨서 옮기게 생겼다. 산 넘어 산이다. 그래도 올해 안에는 꼭 낼 거다.

★왜 진작 도전 하지 않았나
전에는 성공하고 싶고,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음반을 내고 가수가 되려고 했다면 지금은 그저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해보고 싶어서 한다. 포크락을 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그동안 록, R&B 등 이것저것 시도했는데 결국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잘 할 수 있는 장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이제서야 들었다.

★정용재에게 음악이란?
‘타임머신’이다. 한참을 묻어두었다가도 다시 꺼내보면 언제나 새록새록 그때 그 시절이 되살아나는!


■나관주
오지로투어 대장

-히말라야 대장님

나관주 대장은 사장님이다. 하지만 사장님이기 전에 대장님이다. ‘대장’이라는 칭호는 산악대를 이끄는 우두머리를 뜻하는 말. 요즘 이슈인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CF에 나오는 엄흥길과 동급이다. 요즘에는 동네 산악회에서도 너도나도 대장이라는 말을 쓰지만 산악인구가 많지 않았던 십 수년 전만해도 이는 ‘영광의 칭호’였다. 1998년 낭가파르밧 8125m를 시작으로 그는 초오유(8202m), 로체(8511m) 등 히말라야 14좌 중 7좌 등정에 성공했고 2002년에는 세계최고봉 에베레스트를 완등했다. 그 공로로 대통령 표창, KBS 공로상을 받았고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산악인 고상돈을 기리는 고상돈 특별상도 받았다. 산을 찾은 지 어언 23년, 대장에게 여행은 여전히 산을 오르는 일이다.

★전문산악인인데 여행사를 차렸다
전문등산장비가 필요한 등정보다는 여행 개념이 가미된 트래킹을 즐기고 싶어서 여행사업에 선뜻 뛰어들었다. 2006년에 6월에 설립했으니 햇수로 3년 정도 되간다. 원래 사장은 에델바이스 아웃도어 밀레에 여행사업을 처음 제안한 왕용 형(한왕용 대장)이었고, 함께 하자고 해서 시작했는데 지난해 그만두고 나가면서 내가 대표이사직을 맡게 됐다.

★산에 미치게 된 계기가 있었나
대학 때부터 산악부에서 활동하면서 국내산을 두루 섭렵했다. 선배들의 무용담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기 때문에 히말라야 같은 높은 산에 대한 동경이 항상 있었다. 특히 산악부 선배 중에 등반하다 동상으로 손가락이 잘린 형이 있었는데 대체 얼마나 위험한 산인지 궁금했다. 그게 북미 매킨리(6174m)로 92년도에 첫 해외 등반을 가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어린 나이에 가능한 도전이었나
1년 동안 유리창 닦기를 비롯해 각종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았다. 92년도에 학교 동기와 함께 올랐는데 결국 녀석이 동상에 걸려 정상을 500m 남겨두고 실패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열의만 있었지 무지하고 무모했던 시절이었다.

★히말라야는 어떻던가
매킨리 이후에 히말라야에 도전한 적이 있었는데 산에 오르지도 못하고 내려왔다. 산을 보자마자 위압감에 엄두가 안 나더라. 에베레스트를 대지의 여신이라는 뜻의 티벳어 ‘초모룽마’로도 부르는 이유다. 그러고나서 다시 준비해서 98년도에 낭가파르밧 등정에 처음 성공했다. 이때는 오히려 편안한 느낌을 받았고 오를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산악대에서 주로 맡은 포지션은 뭔가
카메라, 영상 담당이었다. 에베레스트 등정 시에 찍은 필름이 아직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자주 나온다. 얼마전에는 EBS 다큐-인 ‘히말라야로 간 엄마들’을 직접 인솔하고 촬영도 담당 했다.

★위험한 순간도 많았겠다
죽을 고비가 여러 번 있었다. 특히 에베레스트에서 새로운 루트로 가던 중 동료와 함께 앞선 일행을 따라가는데 눈사태를 만났다. 가속도가 붙은 눈벽이 거의 10층짜리 아파트 정도 깊이로 쏟아졌을 거다. 결국 옆에 있던 친구는 눈 속에 묻히고 나는 겨우 살았다. 생애 가장 아찔한 순간이었을 거다.

★앞으로는 어떤 산행을 하고 싶은가
일반적인 트래킹보다 좀더 난이도가 있으면서도 최고봉들보단 장비가 간단하고 덜 위험한 ‘트래킹피크’가 좋다. 상품으로도 개발해 우리나라 상업등반대도 해외만큼 늘었으면 좋겠다.

★나관주에게 등산이란?
마약이다. 마약처럼 중독될 수밖에 없고 주기적인 매혹이 찾아온다. 그럴 때는 산에 안 가고는 못 배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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