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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더불어 감성의 채도를 높인 것은 이번 여행에서다. 식민시대의 잔재는 풍광 속에 무심히 녹아들고, 생경한 또 다른 베트남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 며칠 동안, 아직 두근거리는 심장이 있음에 감사하고 또 안도했다.

베트남 글·사진=Travie writer 이세미 취재협조=베트남항공 www.vietnamairlines.co.kr 02-757-8920

■Da lat 달랏

▼‘랏의 강’에 흐르는 프랑스적 감성

고백컨대, 지금껏 베트남에 대한 상상력은 무채색에 가까웠다. 과거,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로 대변되던 ‘베트남적’ 색채가 옅어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역사의 어두운 잔재가 머리를 가득 채웠으니까. 해발 1,450m 고원에 흐르는 랏족의 강, ‘달랏’. 잊고 있던 감성과 이곳에서 조우하게 될 줄 짐작이나 했겠는가.

언덕을 따라 얌전히 앉은 색색의 가옥들은 영락없는 유럽의 작은 도시다. 초가을 같은 쾌적한 기온 아래 따뜻한 한낮의 햇볕과 맑은 공기. 이런 기후는 달랏이 화훼와 채소 재배 산업의 대표적 도시로 성장한 원동력이다. 때맞춰 쏟아지는 우기의 스콜과 고도로 인한 가쁜 호흡이 가끔 거슬리기도 했지만, 그쯤이야. 메콩 삼각주의 찌는 듯한 일상이 익숙한 베트남인들에게 이곳은 얼마나 이국적인 느낌이었을까. 하물며 달랏을 발견한 프랑스인들이 자국과 유사한 기후 조건을 가진 이곳을 작은 파리로 만들려는 유혹을 뿌리쳤을 리 없다. 달랏 주변의 수많은 샬레 스타일의 화려한 별장들과 시내에서 볼 수 있는 에펠탑의 모형이 그 증거다. 식민 시대의 유명한 휴양지는 이제 가장 인기 있는 관광 명소이자 신혼여행지가 되었다.

▼막연한 감동이 실체가 될 때

느린 걸음의 버스가 유난히 뒤뚱거리는 통에 단잠은 애초에 포기한 터였다. 정 줄 것 없는 허름한 휴게소에서 목을 축이고 내내 달린 다섯 시간의 여정은 다행히 지루하지 않았다. 길목의 평원에는 아련한 서정이 낮게 깔리고, 1,750m 혼야오산 고개의 자욱한 안개는 서막을 여는 전주곡이었다.

먹구름 사이로 노을이 자리를 틈탈 무렵, 달랏에 도착했다. 두터운 점퍼에 머플러를 두른 채 쏜살같이 옆을 지나는 라이더의 모습에 덩그런 소매의 옷차림이 잠시 무색했다.
막연한 감동이 실체가 된 것은 아마 숙소에 몸을 들일 때부터다.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응우엔 시절, 프랑스와 베트남의 국빈을 위해 건립했던 왕궁호텔을 개조했다는 ‘소피텔 팰리스 리조트’. 바로크 스타일의 샹들리에가 반짝이는 우아하고 섬세한 이 유산에 회심의 미소가 흘러나옴은 어쩔 수 없었다. 달랏 타운 중심에 자리한 이곳은 그 흔한 엘리베이터도, 시계도, 에어컨도 없다. 다만 80여 년이라는 전통의 자부심에 화답하듯 느린 걸음과 여유만이 필요했다.

잘 구운 바게뜨를 씹으며 쑤언 흐엉 호수가 보이는 테라스에서 앙증맞은 앞치마를 두른 종업원의 서비스를 받고, 붉은 조명의 클래식한 와인 룸에서 분위기를 내기까지 프랑스식 기품은 줄곧 주위를 성가시리만큼 배회했다.

귀가하는 인근 초등학생 무리와 마주칠 즈음의 달랏 대성당은 한적하다. 주춤주춤 내리는 비만 아니었다면 대성당 주변의 타운을 어슬렁거려도 좋을 뻔했다. 특별할 것 없는 이 연분홍빛 성당에는 스테인드글래스 창문 아래 부동자세로 사진을 찍어대는 관광객들만이 분주했다. 일요일 아침 방에서 들리던 묵직한 종소리가 아니었다면 이 성당에 대한 기억은 유효기간이 짧았을 것이다.

사람간의 소통, 여행지의 면면을 살피는 데는 시장만한 곳이 없다. 발길을 시장으로 옮겼다. 화훼의 도시답게 입구는 꽃들로 넘쳐나고, 어둑한 건물 내부는 식료품 가게가 주를 이루고 있다. 장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먹는 ‘반 베오(Banh beo, 베트남식 쌀 부침개)’ 한 접시에 성근 가슴이 차 오르다가 금방이라도 들켜 버릴 바가지를 씌우는 모습에 살짝 애석하기도 한 곳. 사과를 우적대며 카메라를 노려보는 호기심 섞인 시선과, 뾰족한 논이 잘 어울리는 주름진 촌로의 모습에 가슴이 저릿한 곳. 살아내고 살고 있는 이들 앞에, ‘삶’이라는 추상적 관념이 오버랩될 겨를이 없는 곳, 그곳이 달랏시장이다.

이런 기분에 예기치 못하게 당황하게 된 건 순전히 ‘크레이지 하우스’의 공이었다. 이름 때문에 기대를 갖고 들어섰지만, 건축가에 대한 의문부호 열 개만을 던지며 나왔다. 왜 하필 ‘crazy’냐라고 묻는다면, 매표소 직원의 말이 해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 집이 정상으로 보이세요?” 전깃줄로 만든 거미줄부터 얽힌 콘크리트 나무뿌리의 통로는 기괴한 객실로 통하는데 호랑이, 곰, 독수리, 거미, 기린 등의 방 이름에 ‘딱’ 맞게 디자인되어 있다. 전형적인 키치를 연상케 하는 이 음산하고 기괴한 방에서 천금 같은 하룻밤을 내맡길 사람이 몇이나 될까.

14년 동안 모스크바에서 수학했다는 건축가의 전력은 건축물에 대한 해석에서 한층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현대인들에게 환경 파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자연으로의 회귀를 강조하고자, 정글에 사는 소수민족의 집을 모티브로 했다고. 그야말로 crazy한 이 건축물의 예외성을 잠시 제쳐둔다면 달랏의 아름다움은 여전히 건재하다.



▼짙은 여운, 짠테우

예술, 죽음, 종교… 뭐 이런 단어들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붓 대신 바늘, 캔버스 대신 천, 물감 대신 오색실로 그려진 베트남 전통 자수화, 짠테우(Tranh Theu). 한 땀마다 혼을 담아 바늘과 혼연일치된 자수 예술가들에게 바느질은 간절한 신앙이다.
단순한 기능이 아닌 예술로의 승화를 위해 영감에 깊이를 더하는 과정은 구도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 화폭 위로 그들은 세상을 재창조한다. 그것은 웃고 울며 사랑하고, 평화롭고 때로는 잔인하다.

전통적으로 베트남 자수는 노동, 외모, 언어, 행실이라는 네 가지 유교적인 덕목을 따르는 베트남 여성들에 의해 이어져 왔다. 초기 자수는 단지 생활 속에서 여성들 스스로의 감정 표출 수단이나 집안의 장식을 위해 사용되다가 본격적인 예술로 승화된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다. 레꽁한(Le Cong Hanh, 1606~1661)이 중국으로부터 자수 기술을 들여온 후, 베트남 고유의 자수기법과 결합시켜 발전을 거듭했다. 후에(Hue)에서는 왕조가 중심이 돼 전문적으로 자수를 활성화시켜 궁정 자수화가 탄생하기도 했다. 이후 1990년대에 들어와서 실크자수의 전성기를 맞으면서 ‘보방구엉(Vo Van Quun)’ 등의 뛰어난 예술가가 등장, 중국 화풍은 점차 사라지고 베트남 고유의 소박하고 순수한 색채를 띠게 된 것이다.

‘XQ 달랏 역사관’이라는 이름의 달랏 전통자수관의 규모와 깊이는 놀랍다. 작품들의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생동감과 사실감, 무엇보다 정교함에 감탄하게 된다. 이곳의 자수 예술가들은 하루 8시간 작업으로 보통 한 작품에 짧게는 3개월부터 초상화 같은 정밀 작업은 6개월까지 매달린다고.


★HOT SPOTS

■ 소피텔 달랏 팰리스 리조트 & 달랏 팰리스 골프클럽
1922년에 문을 열었다. 프랑스풍의 클래식한 인테리어가 5개의 스위트룸을 포함한 총 43개의 객실을 장식한다. 도서관, 헬스장, 포켓볼 룸, 테니스 코트와 와인 룸, 다양한 분위기의 레스토랑과 피아노 바, 지하에는 유러피안 스타일의 펍까지 갖추었다. 특히 리조트와 연계된 달랏 팰리스 골프클럽은 1932년에 문을 열어 1996년에 리뉴얼됐다. 울창한 소나무 숲과 정교한 그린, 호수 등 최상의 18홀 코스는 플레이어들의 선망의 대상. 소피텔의 골프 패키지 상품이 슈페리어룸 2박에 1인 기준, US$ 274(2009년 12월 31일까지).
홈페이지 www.sofitel.com 예약 84-63-3825-444

■ XQ 달랏 자수 역사관 XQ Dalat Historical Village
달랏 본사는 2001년 12월 문을 열었다. ‘보 반 쿠안(Vo Van Quan)’과 ‘호앙 르 쑤안(Hoang Le Xuan)’ 두 예술가 부부가 설립했다. 부인인 호앙 르 쑤안은 후에의 전통 자수 기법을 그대로 전수받은 인물이다. 하노이, 호치민, 나짱, 후에, 다낭에도 센터가 있고 하와이, 러시아, 샌프란시스코에도 지사를 두고 있다. 자수 소품에서 옷까지 판매하는 숍과 카페, 자수 예술가들이 직접 광장에서 의식을 진행하는 공연도 펼친다. 사진촬영은 허가 후 가능. 입장료는 없다.
주소 258 Mai Anh Dao St. Ward 8
홈페이지 www.xqhandembroidery.com

■ 크레이지 하우스 Crazy House
‘항 응아 게스트하우스 & 갤러리(Hang Nga Guesthouse & Art Gallery)’. 1981~1988년까지 베트남의 두 번째 주석을 지낸 ‘쯔엉 찐(Truong Chinh)’의 딸인 당 비엣 응아(Dang Viet Nga) 여사가 설계한 이 건축물은, 1990년부터 건축을 시작해 현재도 진행 중이다. 각기 다른 이름으로 10개국에 50개의 건물이 있다.
주소 3 Huynh Thuc Khang 관람시간 오전 7시~오후 7시
입장료 1만6,000동

■ 사랑의 계곡 Thung Lung Tinh Yeu
바오 다이 황제에 의해 평화의 계곡이라 불리다가 1972년 ‘다 티엔(Da Thien)호수’가 조성되면서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제법 긴 계단을 내려가 모터보트를 타고 호수를 내달리는 기분도 나쁘지 않다.
위치 쑤언 흐엉 호수에서 북쪽으로 5km

■ 달랏 대성당 Nha Tho Lon Da Lat
베트남에 거주하던 프랑스인들을 위해 1931~1942년에 지어졌다. 첨탑 꼭대기에 수탉의 형상이 있고 성당 지하에는 교인들의 묘지가 있다.
위치 노보텔 달랏 호텔 바로 옆

■ 프렌 폭포 Thac Prenn
달랏 타운에서 약 10km 떨어져 있다. 15m 높이의 폭포 뒤로 물보라를 맞으며 빠져나갈 수 있고, 케이블카가 설치돼 있다.
위치 달랏에서 판 랑과 탑 잠 방면 13km 지점
입장료 1만5,000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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