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년 왕십리’에 부슬부슬 비가 내리듯 1969년 무교동엔 주룩주룩 술이 내렸어. 그 땐 주로 무교동에서 술을 마셨어. 거기가 재개발되기까지 소위 ‘관광쟁이’들이 선후배와 어울려 막걸리에 낙지를 안주삼아 여행담을 나눴지. 그 엄청 매운 무교동 낙지가 그 때 유래된 거야.

1969년 한일교통을 시작으로 관광업에 몸을 담았지. 화신백화점 옆 1층인데 그 땐 그 7층 건물이 제일 높았던 거 같아. 서울교통, 은마교통, 조양교통 등…. 어려운 시기에는 ‘고통’이라고도 했어. 힘들고 고생이 심해서 그랬는데 그래도 그 때가 더 정 있고 의리 있고 술 있고 낭만이 있었던 거 같아.



■무교동 매운 낙지에 깃든 낭만

관광버스를 보유하고 국내모집관광을 했지. 해외여행은 거의 없을 때니까. 총포, 수렵, 낚시, 미군부대 공연수송에 주로 따라 다녔어. 신문광고대신 쇼 윈도우를 활용했지. 포수가 쏘고 꿩이 떨어지고, 월척을 올리는 낚시 그림 아래 회비와 연락처를 쓰고 예약을 받았어. 그 후엔 총포사, 낚시점을 돌며 전단을 뿌렸지.

미군부대는 의정부, 동두천 등지의 공연장을 일제 조립 ‘이스즈’ 버스로 운행했는데 소음이 적어 가수와 악단에게 인기가 좋았어. 공연 개막 전에 분위기 메이커가 등장해. 요즘엔 개그맨이 하던데 그 때는 사회자가 다 했어. 언젠가 밑천이 떨어졌는지 나를 불러 노래를 해보래. 마침 클럽 안이 썰렁할 때라 철판 깔고 마이크를 잡았어. 정신없이 두 곡을 불렀는데 견딜만하다고 그 후로 계속 시키는 거야. 폴 앙카(Paul Anka)의 ‘크레이지 러브(Crazy Love)’와 ‘오, 캐롤(Oh, Carol)’을 지겹게 불렀어. 팝송은 그거 밖에 아는 게 없었으니까.(웃음) 그런 연유로 국내관광 호시절에 버스 마이크 잡고 방방곡곡을 누비는 떠돌이 가이드가 된 거야.

■노래가 손님이요, 돈이었던 시절

처음 입사 때 사장님이 노래를 시키더라고. 노래를 잘해야 단골이 생기고 소문이 나면서 또 다른 손님을 몰고 온다고. 잘은 못해도 열심히 한 덕에 아줌마 팬이 많이 생겼어. 부유층 고객이라 팁이 후했어. 먹고살기 힘든데 누가 관광을 가. 과시욕 있잖아. 그냥 푹푹 찔러 주는 거야. 월급 1만5,000원일 때 숙박행사 몇 번이면 그 이상 벌었어. 오는 날은 전 직원이 퇴근 않고 기다려. 몽땅 무교동에 끌고가 팍팍 쐈지. 통금에 걸리면 ‘스타다스트’ 나이트클럽에서 몸부림치고 청진동에서 속 풀고, 그게 관습이었어. 선물도 부장님, 과장님, 직원 등 내 건 못 챙겨도 순서대로 꼭 챙겼는데 요즘엔 누가 그래, 세월이 변하니 빈손으로 오더라고.

노래가 돈이 되다보니 아무튼 죽어라 외웠어. 재일동포 모국방문단이 쏟아져 들어올 때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전국을 강타했어. 유신말기 때는 심수봉의 ‘그 때 그 사람’을 많이 불렀어. 그 때 고객들이 지금도 나를 따라다녀. 지난해에는 백발이 성성한 그분들을 업다시피 해 중국 장가계를 누볐지. 호수에서 배를 탔는데 노래하며 손뼉치고, 흥겨운 광경에 다른 관광객들이 신기한 듯 구경하며 다른 여행사 가이드에게 왜 우린 저렇게 안 놀아 주냐고 투정도 했어. 후배들은 ‘저 분은 구석기시대 가이드라서 그렇다’며 익살을 떨고….

■아버님의 제자 세방 이상필 부회장

아버님이 탈북해 속초고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는데, ‘TMC’ 산행 중 평소 선망하던 세방여행 이상필 선배님께서 아버님 얘기에 내손을 잡고 “아이고~ 스승님의 아들을 50여 년 만에 여기서 만나다니~”하시는 거야. 까마득한 옛날, 담임이셨던 아버님이 국어, 미술, 음악, 체육 등 다 가르치셨대. 아버님은 가족보다 제자들을 더 챙기셔서 늘 그게 불만이었지. 늦게나마 철이 들어 본받고자 하는데 늘 부족함을 깨달아.

정리=김선주 기자 vagrant@traveltimes.co.kr
"
저작권자 © 여행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