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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섬은 일본이 아닌 류큐 왕국의 땅이었다. 오키나와 여행은 눈부신 바다를 경험하고 류큐 왕국의 전통 문화를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오키나와는 눈부시다. 산호의 퇴적으로 생성된 섬들과 섬들을 둘러싼 바다와 바다 아래 점점이 박힌 산호초들이 만들어내는 매혹적인 풍경은 왜 오키나와를 ‘일본 속 남국’이라 칭하는지를 여실히 입증한다. 광대한 자연과 유구한 문화로 축소 지향의 일본에 이채로운 색깔을 덧입히는 곳이 바로 오키나와다.

일본 오키나와 글·사진=Travie Writer 노중훈
취재협조=일본항공 www.kr.jal.com, 02-757-1711

이웃한 일본은 여행지로서 여간 만만해 보이는 것이 아니다. 워낙 가깝기 때문에 언제든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여러 번 방문한 사람도 부지기수다. 일본여행 전문가인양 자처하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하지만 일본은 단칼에 설명되지 않는다. 파고들수록 다양한 스펙트럼에 은근히 놀라게 된다. 일본은 결코 작은 섬나라가 아니다. 간단명료한 예를 들어보자. 도쿄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키나와에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3시간 여. 서울에서 도쿄를 가는 시간보다 길다. 홋카이도 와카나이의 연평균 기온은 섭씨 6.3도, 오키나와 나하의 그것은 22.3도에 달한다. 남북 차이가 무려 16도다. 이런 객관적인 수치 이외에 오키나와의 이국적인 환경과 풍광이야말로 ‘일본은 넓다’라는 명제를 실감나게 해준다.



■실리를 추구했던 독자적인 왕국, 류쿠

일본 최남단에 자리한 오키나와 현은 40여 개의 유인도와 수많은 무인도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규모가 제일 큰 것이 오키나와 본섬이고, 현청 소재지인 나하 시도 이 섬에 자리한다. 오키나와에서 만난 한국인 가이드가 처음 꺼낸 말은 “오키나와는 일본 속 또 다른 일본입니다”였다. 날씨, 분위기, 문화, 음식, 얼굴 생김새 등이 일본 내 여느 지역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류큐(琉球)’라는 두 글자를 파고들어야 한다.

오키나와는 17세기까지 류큐라는 독자적인 왕국이 지배하는 땅이었다. 이들은 언어, 풍속, 신앙 등 모든 면에서 독자성과 고유성을 견지했다. 일본 본토와는 상이했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일본보다 중국 남방계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류큐라는 글자는 중국에서 가장 방대한 역사 기록물인 명실록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때는 1368년. 오랫동안 중국을 호령하던 원나라가 패망하고 한족 국가인 명(明)이 들어섰다. 명나라의 태조는 주변 국가에 사자를 보내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알림과 동시에 복속을 요구했다. 류큐 왕국은 실리 외교를 선택했다.

아시아의 최강자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이후 청나라 말까지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나갔다. 왕국은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중계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중국에서 구입한 도기와 비단으로 한국과 동남아시아 각지의 특산품을 가져온 것이다. 물질의 거래는 문화의 교류를 동반하게 마련인데, 흡수된 이질적인 문화는 오키나와의 전통문화와 서로 말문을 트며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자리를 잡았다.

독립국으로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던 류큐 왕국은 그러나 1609년에 허물어지고 만다. 지금의 가고시마에 해당하는 사쓰마번의 시마즈 가문이 보낸 군대에 의해 함락당한 것이다. 이후 메이지 정부는 1879년 류큐 사람들의 강력한 반발을 무릅쓴 채 오키나와라는 이름으로 섬 전체를 일본에 편입시킨다. 류큐라는 이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류큐에서 오키나와로 문패가 바뀐 뒤에도 수난은 계속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진 곳이 바로 오키나와인데, 1945년 3월부터 6월까지 발생한 오키나와 전투로 인해 민간인 포함 무려 20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전쟁에서 패퇴한 이후 1972년 다시 일본 영토로 편입되기까지 오키나와는 27년 동안 미국의 통치를 받게 된다.

■치열했던 역사가 아로새겨진, 나하

오키나와 여행은 본섬의 나하 시로부터 비롯된다.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 역할을 단단히 담당하고 있는 곳이다. 남국의 자연을 풍성하게 갖춘 오키나와의 여행 지도에 쇼핑과 시티 투어의 무늬를 새겨 넣는다. 시의 상업 중심지는 국제거리.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으며 잿더미로 변한 거리였으나 각고의 노력 끝에 지금의 모습으로 환골탈태했다. 약 1.6km의 구간에 백화점, 기념품 상점, 영화관, 음식점 등이 즐비하게 늘어선 모습을 보면 국제거리를 두고 하는 말인 ‘기적의 1마일’이 실감 난다. 활기차고 세련된 분위기가 가득하며, 밤늦게까지 주민들과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근처에 위치한 헤이와도리 역시 쇼핑의 거리인데, 국제거리에 비해 수더분한 인상을 띤다. 채소와 해산물, 희귀한 식재료 및 약초 등이 유통되는 공설 시장이 가볼 만하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꾸려가는 홋홋한 살림살이의 일단을 엿볼 수가 있다.

나하 시 동부의 슈리는 450년에 걸쳐 독자적인 나라를 유지했던 류큐 왕국의 수도로 번성했던 곳이다. 핵심은 역시 슈리 성. 13~14세기에 걸쳐 류큐에는 호족들의 침략이 빈번했다. 그들은 주로 구릉 위에 성과 요새를 쌓고 싸움을 치렀다. 끝날 것 같지 않던 혼란은 1429년 쇼하시라는 인물에 의해 정리됐다. 그는 호족들과의 거듭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류큐 왕국 최초의 통일 왕조를 수립했다. 왕위에 오른 쇼하시는 남아 있는 성들 가운데 하나인 슈리 성을 정비하고 확장해서 정치의 중심지로 삼았다.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은 류큐 왕국의 슈리 성은 일본 본토의 성들과는 뚜렷이 구분된다. 중앙의 광장을 정전, 북전, 남전 등의 건물이 에워싼 공간 구성부터가 자금성으로 대변되는 중국의 궁전 양식과 흡사하다. 슈리 성에서 가장 화려한 곳은 왕이 거주했던 공간인 정전(세이덴)이다. 류큐 왕국이 남긴 최대의 목조 건축물로, 붉은색의 외관이 인상적이다.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금박과 33마리의 용 문양, 그리고 햇볕을 가리거나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해 건물 중앙 부분에 설치된 반곡선 형태의 구조물 등이 당시의 영화로움을 넌지시 일러준다.

슈리 성은 축성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건물이 아니다. 수차례에 거쳐 소실과 재건이라는 과정을 감당했다. 한때 성벽과 건물의 기초만 남을 정도로 훼손이 심했으나 본격적인 복원 공사를 통해 1992년 일반에 공개됐다. 지금도 슈리 성 재건 사업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 2000년에는 슈리 성터를 비롯한 류큐 왕국 관련 유적들이 일본에서는 11번째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슈리 성은 나하 시에서 가장 높은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다. 덕분에 쪽빛 바다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나하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travel info. 오키나와 ‘잘’ 여행하는 법

김포-하네다, 김포-오사카 구간의 직항 편을 운영 중인 일본항공(JAL)을 이용하면 오키나와 본섬은 물론이고 외곽의 다양한 섬들로 편리하게 다녀올 수 있다. 우선, 오키나와 본섬의 나하에서 이시가키까지의 비행시간은 약 50분. 이시가키-미야코, 미야코-나하 구간의 비행시간은 각각 30분과 50분이다. 일본항공은 도쿄와 오사카를 경유해 오키나와로 향하는 왕복항공권을 2월28일까지 최저 42만원에 판매한다. 일본 국내선 요금이 구간당 6~7만 원으로 저렴하고, 하네다 공항의 신청사 오픈으로 환승이 쉽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원할 경우 도쿄나 오사카에서 며칠간 머무를 수도 있다. 일본항공의 오키나와 특가 항공권은 김포-오사카-나하-오사카-김포 42만원, 김포-하네다-나하-오사카-김포 48만원, 김포-하네다-이시가키-오사카-김포 48만원, 김포-하네다-나하-이시가키-오사카-김포 55만원, 김포-하네다-이시가키-미야코-나하-오사카-김포 58만원이다. 유효기간은 14일이며 마일리지는 국제선 70%, 국내선 100%가 적립된다. 02-757-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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