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를 할퀴는 겨울바람이 매서우면서도 명징하다. 목구멍을 넘어간 녹차의 향이 실핏줄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 살뜰히 퍼진다. 나직한 후성으로 건네는 스님의 말씀이 묵직한 듯 하면서도 새털처럼 가볍다. 예서 촘촘한 세상의 그물은 나른하고 아랫동네의 악다구니는 들리지 않는다. 한동안 승모근이 아주 뻣뻣했는데 무심코 만져 보니 한결 부드럽다.
영월의 명찰인 법흥사에서 주관하는 템플 스테이를 경험하고 돌아왔다.

에디터 트래비 글·사진 Travie writer 노중훈
취재협조 하나투어 1577-1233 www.hanatour.com



1 절에서 쓰는 승려의 공양 그릇. 발우 또는 바리때라고 불린다 2 법흥사 부근을 산책 중인 스님의 뒷모습 3 법흥사 적멸보궁 앞의 연등 4 법흥사 적멸보궁의 풍경. 적멸보궁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5 사찰에서는 음식을 먹는 일인 공양도 수행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6 몇백년 된 소나무들이 청령포의 단종 어소를 호위하듯 감싸고 있다 7 마음의 눈을 뜨라는 취지에서 눈을 가린 채 길을 걸어 보는 템플 스테이의 한 체험 8 청령포를 오가는 나룻배. 강이 얼어붙은 탓에 운행을 멈췄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 사람들은 여행의 속도를 낮추고 싶어 한다. 걷기 여행에 대한 열망이 거센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나는 믿고 있다. 사찰의 템플 스테이나 성당의 피정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묵상이나 기도를 통해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종교는 상관없다. 그저 사유와 침묵을 통해 마음을 말갛게 세수시킬 뿐이다. 단거리경주 같은 삶의 속도에 제동을 거는 것이며, 칼바람을 맞아 움츠러든 몸에 따뜻한 봄볕을 쪼이는 것이다.

법흥사는 영월을 대표하는 절집이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다. 신라의 고승인 자장율사가 선덕여왕 때 당나라에서 진신사리를 모셔 와 봉안했다. 템플 스테이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따로 있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찾아와 여관에 투숙하듯 해서도 될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정제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한국의 문화사적 감각이 고루 배어 있는 사찰을 요모조모 뜯어보며 우리의 정신적 유산의 일부를 체험해 보겠다는 호기로움까지 있다면 금상첨화다.

사찰에서 유하며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주요한 일과는 예불과 참선이다. 사찰의 하루는 스님과 대중들이 일어나 주불이 모셔진 법당에 모여 부처님을 예경하는 새벽 예불로 시작된다. 풋풋한 미명의 기운 속에 이루어지는 이 장엄한 의식은 머릿속 잡념과 마음속 번뇌를 깨끗이 내친다. 108배와 참선 수행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에 다름 아니다.

차를 마시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차를 마시는 습관이야 동양의 각국이 모두 간직하고 있지만 다선일미(茶禪一味)의 경지로까지 승화되어 군더더기 없는 다도를 이룩한 곳은 한국의 사찰이 단연 으뜸이다. 다선일미란 차를 마시는 일이 곧 선의 참맛을 느끼는 것과 같다는 의미다. 초의선사는 조선 후기의 대선사이자 한국의 다도를 일으킨 다성(茶聖)이다. 그는 차를 마시면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고 했다. 즉, 차 안에 부처님의 진리와 명상의 기쁨이 다 녹아 있다는 것이다.

뭇 생명과 이웃을 아끼고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가장 절제된 식사법이 발우공양이다. 불교에서는 식사도 수행의 한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다.

아침 공양 후 사찰 내 모든 대중이 자연스럽게 모여 함께 노동에 임하는 것은 울력이다. 계절에 따라 눈이나 낙엽을 쓸기도 하고, 경내의 곳곳을 정비하기도 한다.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다.

사찰에서 하룻밤을 묵고 난 뒤에는 영월 관광에 나서 보자. 영월은 강이 부르는 노래다. 동강, 서강, 평창강, 주천강 등 문패는 다르지만 한몸에서 흘러나온 영월의 강들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물길을 만들고 암석을 깎고 마을을 빚어낸다. 강들은 강압적이거나 일방적이라기보다 땅의 생긴 모양이나 형세를 살펴가며 영월 땅 곳곳에 아름다운 풍경을 조각해 놓았다.

사람들이 근래 들어 많이 찾는 곳은 서강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강이 주물러 놓은 이른바 ‘한반도 지형’을 내려다볼 수 있는 강변의 야산이 집결지다. 사람들은 백두대간을 닮은 그 오묘한 지형을 굽어보며 감탄사와 카메라 셔터 소리로 논평을 대신한다.

단종은 어린 임금이었다. 10살 때 세손에 책봉됐고, 불과 2년 뒤인 12살에 보위에 올랐다. 단종은 외로운 임금이었다. 아버지 문종은 임금이 된 지 2년 3개월 만에 승하했고, 어머니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출산 후유증으로 세상을 등졌다. 단종은 슬픈 임금이었다. 지근거리에서 자신을 보좌하던 황보인과 김종서 등이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제거되면서 그는 허울뿐인 왕으로 전락했다. 결국 1455년 한명회 등의 강요에 못 이겨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했다. 역사는 이를 계유정난이라 적고 있다.

단종의 비애를 조금 더 적어 보자. 정권을 찬탈당한 이듬해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 운동을 주도하다 결국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세조는 단종을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냈다. 단종이 영월에서 갇혀 지낸 곳이 바로 청령포다. 강이 삼면을 휘돌아 흐르고 뒤로는 절벽이 버티어 선 청령포는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청령포에는 유난히 큰 소나무가 있다. 단종은 종종 소나무에 걸터앉아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다. 소나무는 단종의 애달픈 모습을 보고(觀), 단종이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고(音) 해서 관음송이라 불린다.

지금의 청령포는 단종의 애사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저 혼자서 아름답다. 장릉은 단종의 무덤이다. 지방에 모셔진 유일한 왕릉이다. 임금의 무덤은 보통 한양 백 리 안에 두는 것이 상례다. 죽어서도 외로운 단종과 벗하고 있는 것은 주위의 소나무들이다. 모두 능을 향해 절을 하듯 굽어 있다. 영월에서는 매년 한식날을 전후해 장릉 제례를 지낸다. 이를 단종제라 하는데, 지금은 영월의 주요한 문화 행사로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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