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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시와 남해군을 잇는 삼천포대교와 유채꽃의 어우러짐이 아름답다


경상남도의 끝자락, 한려해상국립공원을 끼고 있는 남해안의 마을에는 고즈넉한 풍경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리적으로는 하동부터 김해까지, 시간적으로는 임진왜란 때부터 노무현 대통령이 숨을 거둔 2009년. 그러니까 바로 오늘날까지 굴곡의 역사를 문학과 예술의 프리즘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여기에 경이로운 자연 풍광과 미각을 자극하는 남도 음식까지 한번에 만끽할 수 있으니 이만한 여행지가 우리나라에 또 있을까 싶다.

경상남도 하동~창원 글·사진=최승표 기자, 취재협조=경상남도 055-211-4866 www.gntour.com


■섬진강 아스라이 보이는 토지길 산책

봄의 한복판을 지나는 계절인데 남녘의 벚나무는 꽃의 기억조차 떨친 듯 보였고, 바다에서는 무더위를 암시하는 바람이 불어왔다. 하동을 거쳐 사천, 통영, 거제, 창원, 김해까지 경상남도의 바닷가 도시를 서에서 동으로 관통하는 여정은 가슴이 벅찼다. 우리 역사의 명멸을 함께한 선조들의 삶의 현장과 전쟁보다 치열하게 예술혼을 꽃피워낸 예술가들의 흔적이 이곳에 살아 숨쉬고 있는 까닭이었다. 기이한 자연 풍광과 예스러운 시골풍경을 구경하는 재미에 눈이 행복하고, 맛난 음식이 많아 입이 즐겁지만 이보다 오랜 여운으로 남는 것은 이 땅에 살다간 옛사람들의 치열했던 삶의 흔적들이다.

섬진강이 고요히 흐르는 하동으로 먼저 향했다. 산삼보다 영양가가 높다는 재첩국에 재첩회 한접시를 먹고, 최참판댁으로 향했다. 박경리의 <토지>의 배경이 되는 최참판댁을 재현해 놓은 하동의 대표 관광지다. 25년에 걸쳐서 완성된 소설의 감흥을 관광지로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드라마 세트장으로 사용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 공간은 동학농민운동, 일제 식민지, 광복에 이르는 60년 세월을 상상해볼 수 있는 감흥을 주기에는 충분하다. 본채에서 평사리의 평야와 저 멀리 섬진강이 아스라이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장관이다.

섬진강을 따라 전남 구례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순전히 화개장터를 보기 위해서다. 그런데 장 풍경이 허망하기 짝이 없다. 지역이 쇠락하면서 상권이 죽자 상시시장으로 되살려놓은 화개장터의 모습은 도리어 흉물스러웠다. 5일마다 윗마을 구례 사람, 아랫마을 하동사람이 모여 요상한 물건들을 팔던 화개장터는 이제 날마다 관광객을 받기에 여념이 없었고, 오히려 성남 모란시장이나 소래포구보다도 활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약재부터 채소까지 가게마다 파는 물건도 비슷하다. 본래의 화개장터 시절부터 장사를 해왔다는 할머니는 자기 밖에 ‘진짜 화개장터’ 출신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냉전과 현대화, 모순의 역사를 만나다

경상남도 남해안의 도시들은 또한 굴곡 많은 우리 현대사의 풍경을 곳곳에 간직하고 있다. 일제 식민 시절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이념 갈등이 그치지 않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건이 이곳에서 벌어졌고, 굵직한 인물들이 이 땅에서 나고 자랐다.
삼천포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사천시에는 항공우주박물관이 있다. 한국전쟁 시절, 실제 전투에 투입됐던 항공기에 탑승해 당시 군인들의 유품까지 관람할 수 있다.

사천시는 항공 우주산업의 메카로서 6·25 전쟁과 국가 안보에 대한 교육 차원에서 박물관을 건립했다. 안내를 맡은 문화해설사도 철두철미한 안보의식으로 무장한 듯 했다. 해설사는 북한과 중국에 대해 설명할 때는 ‘모택동이’, ‘김일성이’라고 경칭을 썼고, 남한에 대해 설명할 때는 ‘우리 이승만 대통령님’하고 또박또박 존칭을 사용했다. 여기까진 이해가 가는데 ‘우리 이건희 회장님’이라고 까지 존칭을 아끼지 않고 붙여주었다. 이 또한 우리 현대사의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니겠는가.

거제시에는 한국전쟁 당시 UN군에 포로가 됐던 공산군을 수용했던 포로수용소가 복원돼 있다. 인민군 15만명, 중공군 2만명 등을 수용한 이곳은 휴전 후 폐쇄됐고, 친공포로들은 판문점을 통하여 북으로 보내졌다. 현재는 수용소의 일부만이 남아 당시의 상황을 말해준다. 포로수용소도 결국 안보 의식을 일깨우는 교육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냉전시대의 흔적 못지 않게 경상남도 남해안은 민주화와도 질긴 인연을 갖고 있다. 민주화의 상징인 김영삼 전 대통령,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애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 거제와 김해에 복원돼 있다. 멸치잡이로 큰 돈을 만진 아버지 밑에서 자라 우역곡절 끝에 대통령이 된 한 사람과 고졸 출신으로 변호사가 되고 대통령이 되고, 죽음마저 영화처럼 마무리한 사내의 삶은 극명하게 대비되지만 모두 굴곡의 한국 역사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을 생각에 잠기게 한다.

■박경리, 윤이상 … 전설을 낳은 마을들

작가 박경리의 흔적은 그녀가 나고 자란 통영에도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박경리를 기념하는 공간은 하동과 통영 외에 원주에도 있다. 하동은 <토지>의 배경이고, 원주는 박경리가 <토지>를 저술했던 공간으로 현재 ‘박경리문학공원’이 조성돼 있다. 통영은 그녀의 생이 시작되고 끝난 곳으로,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이기도 하다.

대문호나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예술가들의 기념관은 그 이름의 아우라 때문에 아무리 다양한 볼거리로 꾸며 놓았다 해도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다. 허나 통영 박경리기념관은 생명과 자연을 존엄하게 여기고 평생을 소박하게 살다간 작가의 세계관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자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기념관 마룻바닥을 잔꽃송이가 핀 들길처럼 꾸민 것도 이 때문이다. 작가가 가장 애착을 가진 유품인 자개장, 국어대사전, 재봉틀과 육필 원고에는 세월의 흔적을 머금고 있어 작가를 그리워하는 방문객들을 아련한 감상에 젖게 만든다.

기념관의 뒤켠에는 야트막한 산에 ‘박경리공원’이 형성돼 있다. 소박한 정원과 시비(詩碑)가 조화를 이룬 공원을 따라 오르면 작가의 묘소가 나온다. 작가를 추앙하는 방문객들은 절을 올리기도 하고, 잠시 벤치에 앉아 통영 앞바다를 내려다 보며 바람을 쏘였다 내려가곤 한다. 순수를 잃은 시대, 작가의 작품과 오직 문학에만 몰두한 그녀의 삶,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는 듯했다.



-동양의 나폴리에 꽃핀 예술혼

통영은 예술의 고장이다. 해방을 전후해 문학, 음악, 미술 등 다양한 분야의 거장들을 배출했다. 그 중에서도 한국에서 주목을 받지 못한 한 예술가를 기념하는 공원이 통영시 도천동 아파트 단지 사이에 어색하게 자리하고 있다. 대한민국보다 북한에서, 유럽에서 존경받는 음악가 윤이상은 고국으로부터 버림 받았지만 누구보다 고국을 사랑했고, 이를 음악으로 승화시킨 예술가였다.

윤이상은 베를린 유학 중 동백림 사건에 휘말려 ‘빨갱이’로 몰려 평생 귀향할 수 없는 운명으로 살다가 독일에서 생을 마감했다. 기념공원에는 그의 유품들을 전시해 놓았으며, 실내 공연을 위한 메모리홀, 야외 공연과 이벤트를 위한 경사광장이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갖춰져 있다. 기념공원 뒤켠에는 윤이상이 독일에서 살던 집을 축소 복원해놓은 주택과 함께 그가 타던 벤츠 승용차도 전시돼 있다.

창원에는 세계적인 조각가로 명성을 떨친 조각가 문신을 기념하는 미술관이 있다. ‘창원문신미술관’은 파리에서 활동하던 문신이 1980년에 귀국해 작품을 만들던 공간을 미술관으로 만들어 마산시(현 창원시)에 기증한 시립 미술관이다. 원목, 철제 등을 이용해 기하학적인 모형의 작품은 유럽을 비롯한 해외에서 호평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미술관 앞 벤치에 앉아 있던 한 노인이 기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 난해한 조각품이 이해가 가시오? 도통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이곳을 찾는 외국인들은 얼마나 열광하는지…… . 파리에 여행 갔을 때, 문신과 같은 고향에서 왔다고 하니 많은 이들이 최고의 예술가라고 추켜세웠을 때 당혹스러웠던 추억도 있지요”



★Tip. 맛없는 경상도 음식‘편견 실종’

경남 남해안 지역은 먹거리가 많기로도 유명하다. 하동의 맑은 섬진강에서 건져올린 재첩은 그 올망졸망한 모습과 그것을 우려낸 국의 맛이 참 정갈하고 순박하다. 보성녹차에 비해 대중성은 떨어지지만 깊이있는 맛을 자랑하는 하동 녹차도 탁월하다. 사천은 풍부한 해산물과 싱싱한 횟감으로 유명하다.

창원에서는 옛 마산의 아구찜 골목에서 아구찜을, 거제에서는 멍게비빔밥을 놓친다면 크게 후회하게 된다. 재래시장과 어시장에서는 싱싱한 해산물과 건어물, 젓갈 등 반찬류를 만날 수 있다. 거대한 규모의 마산 어시장은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겁다. 최근 경남 남해안 일대의 도시들은 관광 인프라가 개선되고 있다.

무엇보다 교량 건설로 접근성이 좋아지고 있으며 상권이 빠르게 형성되고 있다. 창선·삼천포대교는 사천시와 남해군을 연결하는 5개의 교량으로 늑도와 초양도 일대에 펼쳐진 유채꽃밭은 장관을 연출한다. 부산과 거제도를 잇는 8.2km의 거가대교는 지난해 12월 개통돼 이동이 편리해졌다. 서울에서 경남 남해안을 여행하려면 KTX를 타고 창원으로 이동하는 방법이 가장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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