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토부 공무원들의 연찬회가 논란이 되자 이명박 대통령은 “공무원들이 연찬회할 때 업자들이 뒷바라지하는 것은 오래전부터다. 나도 민간에 있을 때 을(乙)의 입장에서 뒷바라지를 한 일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스스로도 인정하듯 한 때 을의 입장에 있었던 이 대통령은 취임 후 종종 공무원과 관련된 자신의 기억을 언급하고 상생을 이야기 해왔다.

굳이 대통령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언제부터인가 ‘갑을관계’와 ‘상생협력’은 N극과 S극이 붙어있는 막대자석처럼 하나의 상용구로 사용되고 있다. 워낙 오래된 탓에 ‘갑과 을의 관계에서 탈피해 상생의 길을 모색하자’는 호소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다. 하지만 대통령의 영(令)이 서지 않는 탓인지 ‘을의 입장에 있었다’는 기업인이 대통령에 오르고 3년이 지나도 불합리한 갑을관계는 도처에서 여전하다.

사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계약서의 갑과 을은 그저 계약자들을 지칭하는 단어일 뿐이다. 누가 위에 있고 누가 아래에 있는 수직이 아니라 수평의 개념이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갑과 을이 갖는 지위의 높고 낮음은 확연하다. 갑은 갑이고 을은 을이다. 오죽하면 ‘아들아 너는 갑의 인생을 살아라’라는 책을 쓰겠다는 농담이 나오겠는가.

성수기를 앞두고 영업에 전념해야 할 항공사와 여행사 간에 최근 때 아닌 갑을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갑’중에서도 ‘슈퍼 갑’이라 할 수 있는 양 국적항공사가 서로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중간에 낀 여행사들이 시리즈 좌석을 회수 당했고 성수기 영업에 지장을 받고 있다는 하소연이 골자다. 일부 외항사는 갑을 관계가 역전됐다고 푸념하고 실제로도 예전과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 바탕은 변함이 없다. 항공사는 여전히 갑이고 여행사는 을이다. 수수료는 없앴지만 항공사는 여전히 성수기 좌석과 볼륨 인센티브라는 강력한 칼자루를 쥐고 있다. 항공사의 갑작스런 시리즈 회수 조치 등에 대해 일부에서는 대형 여행사가 너무 성장해 항공사의 통제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냐는 해석도 내놓고 있다.

물론, 좌석 운영이나 영업 등에 관한 정책은 어디까지나 항공사가 판단할 몫이다. 지금까지 관행처럼 유지해온 정책이라고 해서 억지로 끌고 갈 필요도 없고 그러지도 않을 것이다. 이미 항공사들은 필요에 따라 여행사에 제공했던 항공권 판매 수수료 지급도 중단하지 않았는가. 시리즈 좌석과 볼륨 인센티브도 마찬가지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수정을 할 수 있다. 다만, 여행사를 동반자로 생각한다면 원칙을 공유하고 약속을 지키며 주요 사항의 변경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이뤄져야 한다.

한마디로 예측 가능해야 한다. 그래야 신뢰도 쌓인다. 청중평가단의 점수로 탈락자를 정하기로 했으면 그래야 한다. 처음부터 재도전 운운하며 룰을 갑자기 변경하겠다고 나서니 시청자와의 신뢰가 깨지고 비난이 쏟아지는 것이다. 갑을관계를 끊고 동반성장의 관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결국 힘을 쥐고 있는 갑의 역할이 중요하다. 갑이 잘 이끌고 을이 잘 따라야 한다.

한편으로는 갑도 을도 아닌 병의 신세라고 한탄하는 랜드사에 대해 여행사들은 과연 얼마나 떳떳한지도 이참에 되돌아 봐야 한다. 도둑질도 해본 놈이 잘한다고 오히려 더한 방법으로 갑을관계의 위세를 부리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기 검열을 해야 한다. 지금의 갑을관계가 영원하리라는 보장도 없고 성수기가 있으면 비수기도 있다. 규모가 커진 여행사들은 그래도 힘들면 힘들다고 소리라도 낼 수 있다. 억울해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랜드사들이 수두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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