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일
(주)여행이야기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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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5학년 무렵,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외사촌 집에 자주 가곤 했다. 원래 이 정도 범위에 드는 친척이라면 달은 물론이고 날까지 따져 형, 동생을 정하는 예가 많지만 동갑내기인 우리는 그냥 서로 이름을 부르며 지냈다. 여기에 동갑이 세 명이나 되다보니 조금 더 친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그 집에 자주 간 이유는 하나가 더 있다. 우리 집보다 책이 훨씬 많아서다. 책장 빼곡히 꽂혀 있는 갖가지 책은 참 부러운 보물이었다. 컬러 TV가 나온 지 얼마 안 되던 시절, 책 읽기는 큰 재미였다. 책을 읽다 보면 저녁 시간을 넘기기 일쑤고 집에서 걸려온 전화에 끌려가듯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혹시 이런 얘기를 들으면 어떤 분은 ‘어렸을 때 책 많이 읽었다고 자랑하는 거’로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때 책 읽기는 내게 재미없는 교과서를 잊게 해주는 즐거움을 주었다. 어쩌면 책이 귀한 시절이라 그랬을 거 같기도 하다.
사실, 그때도 어지간한 친구들 집에 책장은 있었다. 그러나 책장에는 두껍고 딱딱한 표지에다 한자가 섞여서 읽기도 어려운 세로쓰기 문학책 뿐이라 우리가 읽을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을 보면 상황이 많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여전히 재밌게 책을 즐기는 녀석들도 있지만 책을 읽는 이로움이 널리 알려진 탓에 많은 아이들이 ‘독서 학습’을 하고 있다. ‘독서 교실’도 있다. 커리큘럼에 맞춰 책을 읽어야 하는데 그 일정이 여간 빡빡해 보이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도 책 읽기가 즐겁기만 하지 않을 듯 하다. 책이 넘쳐나는 지금, 이 아이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책 읽기와 비슷한 현상이 여행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듯하다. 예전에 여행은 귀한 혜택이었다. 경주를 가 본 경험은 대부분 중·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이 처음이다. 여행 자체가 귀한 시절이다 보니 방학 때 친척 집에 가는 걸로도 자랑거리였다. 또 집에 자가용(참 오랜만에 써보는 낱말이다)이 있는 집도 귀해서 가족여행을 갈 수 있는 기회는 더더욱 드물었다.
그런데 여행기회가 많아지면서 아이들은 여행을 귀찮게 여기곤 한다. 일단 여행을 자주 한 탓에 신선함이 떨어진다는 이유도 있지만 대체로 여행을 스스로 원해서 가기 보다는 부모 손에 이끌려 떠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부모들은 왜 아이들과 여행을 떠날까? 아마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대답할 듯 하다. 어려서는 재미를 위해, 조금 커서는 공부를 위해서라고.

여행이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면서 결국은 여행도 공부가 되어버렸다. 여행을 가면 책도 읽고 현장에 있는 선생님 말씀도 들어야 한다. 학교에서 현장체험학습도 여러 번 가다 보니 운이 나쁘면 장소가 반복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친구들과 갈 때는 장난이라도 좀 치련만 부모와 함께 가면 영락없이 감시를 받아야 한다.

우리 회사도 많은 학생들에게 여행을 하며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예전과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우리도 공부를 위해 여행을 하라고 권하고 있다. 그러나 처음 회사를 만들려고 할 때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사람들이 우리나라 여행을 재미없게 생각하는 게 속상했기 때문이다. ‘경복궁도 부석사도 경주도 참 재미있게 볼 수 있는데’ 하는 마음으로 그 곳에 깃든 몇 가지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즐거워했다.

대학교 때 답사 준비에 한창 빠져 열심히 공부할 때 어느 절에 가서 선배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그때 돌아온 대답은 “참 좋잖아. 너도 느껴봐”였다. 한 수 가르침을 기대한 나로서는 조금 실망스러운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답사 고수의 대답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느라 달을 보지 못한 하수를 위한.
다시 사람들이 여행에서 여행만 생각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다. 원래 여행만 즐겁게 다녀도 공부는 저절로 되는 거였으니까. 책 읽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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